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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광주 여성사, 치열한 기록만이 우리의 삶을 증명한다

By 고보혜

지역 여성사 연구는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중앙 정부 차원의 거대 담론에 묻힌 지역 여성들의 삶을 복원하고 목소리를 대신 전함으로써 어떤 지역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 속에서 여성의 삶과 경험을 역사화하고,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지역의 의미를 검토해 지역민으로서 여성의 주체성과 행위성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한국 사회에서 지역 여성사 발전은 현대사의 변화와 상관관계가 있다. 1980년대 전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분위기는 각 지역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인 지역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이후 19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돼 본격화되면서 지역은 지역민의 삶의 중요한 단위이자 주체로 정립되기 시작했으며, 지역의 정체성과 고유성에 대한 자부심은 지역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자원으로 작용하게 됐다. 

지자체 차원에서의 행정적 지원과 지역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여성사 연구는 각 지자체마다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고 보존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해왔음에도 현재까지 전해지는 기록이 대부분 남성들에 의해 가부장적 질서를 재확인하고 그러한 논리를 재생산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돼 왔다. 실제로 여성과 관련한 사료들은 대부분 그 중요성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고 기존의 여성 인물과 관련한 유적들도 훼손되거나 유적지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이러한 지역 여성사와 관련한 사료 부족의 한계 속에서 여성사 연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의 사료 접근을 통해 대안 모색이 필요해졌다. 역사서와 같은 전통적인 사료뿐만 아니라 그림, 편지, 일기, 자서전, 사진, 신문기사, 구술사 등의 비전통적인 사료를 포함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통해 여성들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여성 인물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 나가고 있다. 

광주여성가족재단은 2019년 광주 여성사(Ⅰ) 연구를 수행해 고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전근대 시기 광주 여성의 삶의 흐름과 궤적을 살폈다. 과거 현실과 맞닥뜨린 광주 여성의 삶에 주목해 그 시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신하여 전함으로써 역사의 공백을 메꾸고 당시의 삶을 살아온 광주 여성을 조명하고자 했다. 향후 광주 여성사(Ⅱ, Ⅲ) 연구를 계속 추진해 근현대 시기 광주 지역 여성 인물을 발굴, 조명함과 동시에 지역사 서술에 여성주의적 관점의 필요성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역사 연구에 내실을 기하고, 광주 여성 인물과 관련한 아카이브 및 라키비움 등의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신윤복, 『여속도첩(女俗圖帖)』 중 〈처네 쓴 여인〉, 견, 29.7 x 24.5 cm, 조선 시대(1392~1897) ⓒ 국립중앙박물관

수평적 부처 관계에 기초한 여성주의 운동가, 고려 시대 광주 여성

광주는 신라 말 ‘무주(武州)’ 또는 ‘광주’로 불리다가, 940년(태조 23)에는 ‘광주’로 명칭이 개정됐지만 주변의 나주나 승주에 비해 그 등급이 낮았다. 1362년(공민왕 11) ‘무진부(茂珍府)’로, 1373년(공민왕 22)에는 다시 ‘광주목’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고려 시대 광주의 정치적, 행정적 지위 또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고려 시대 광주 지역 여성에 관한 문헌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제대로는 아니지만 그나마 광주 여성들의 이야기를 복원해 내고자 했다. 묘지명의 기록 대부분이 매우 자세하고 생생하기 때문에 한 개인의 일생을 밝혀주는 전기적 자료가 되며, 그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대부분이 귀족 가문의 여성들이고, 광산 김 씨와 관련된 여성들이란 면에서 한계가 있지만, 지금까지의 중앙과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역사 서술을 보완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묘지명에 기록된 광주 지역 여성들 이외에도 『고려사』의 「열녀전」에는 고려 말 왜구가 광주에 침입했을 때 이에 저항하고 정절을 지켰던 강호문의 처 문 씨, 김언경의 처 김 씨 등이 수록돼 있다. ‘열녀’라는 용어는 고려 말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고려사』를 편찬하던 조선 초기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고려의 혼인 풍속은 ‘남귀여가(男歸女家)’, ‘서류부가(壻留婦家)’ 등으로 표현되는 솔서혼(率壻婚)이었다. 즉, 고려 시대의 가족은 부부와 미혼 자녀를 기본으로 하는 소가족인데, 주로 남성이 처가로 이동해 장인과 사위가 동거하는 형태였다. 광주 지역 여성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혼인한 후 사위가 처가에서 계속 처의 부모를 봉양하며 사는 경우가 있지만, 친가로 돌아가 자신의 부모를 봉양하며 사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또한 분가해 처가나 친가의 지역에 거주하거나, 가까운 친족이 살고 있는 연고지나 전혀 연고가 없는 새로운 지역에 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거주 형태는 고려 사회의 양측적 친속 관계 및 자녀의 성별과 관계없는 균분상속과 관련이 있다.

고려 시대의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병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일부일처가 일반적이었다고 여겨진다. 국왕이나 지배층이 여러 명의 처를 두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이 법제화된 것은 아니었다. 지배층의 경우 고려 후기에 여러 명의 처를 두는 다처병축(多妻竝畜)이 나타나 사회 문제가 됐는데, 이 시기 다처제를 비롯한 원(元)의 풍속이 고려 사회에 영향을 미쳐 충렬왕 때 다처제를 공식화하는 법제의 제정이 시도되기도 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후기 다처제를 공식화하는 법 제정을 논의하기 위해 박유(朴褕)가 상소를 올리자, 연등회 날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했던 박유에게 “어떤 한 노파가 손가락질하며 말하기를, ‘여러 명의 처를 두자고 청한 자가 저 빌어먹을 노인네란다’라고 하니, 듣는 자가 서로 손가락질하자 저자의 도로에 붉은 손가락이 한 무더기가 됐다. 당시 재상 중에는 아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그와 같은 논의를 그만두어 실행되지 못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무리지어 박유를 비판하고 재상인 남편을 통해 일부다처의 법 제정을 중지시킨 고려 여성들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이었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어떤 한 노파’는 그 시대의 여성의 권리 증진과 평등한 세상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행동했던 여성주의자였고, 그 주장에 동조하며 손가락질하던 사람들도 여성주의 운동가들이었다.

고려 시대 여성들은 남편과 수평적인 지위와 권리 하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실천했다. 이와 관련한 광주 지역 사례로 옥구군 대부인 고 씨가 고위 관료였던 남편에게 들어온 뇌물을 남편을 대신해 단호하게 물리쳤던 일화, 남편과의 물리적 싸움도 불사했던 홍수로의 처와 최운해의 처 등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고위 지배층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 관계의 수평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수평적 부처 관계를 기반으로 한 고려 사회에서 여성의 이혼이나 재혼도 당연시됐던 사례는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 후기 사회와는 매우 달라 의미 있다.

염경애 묘지명, 돌, 33 x 70 x 3.4 cm, 고려 시대(918~1392) ⓒ 국립중앙박물관, 남편인 고려 중기 문신 최루백이 부인 염경애를 기리며 지은 묘지명이다.

여성 차별의 시대에 주체적으로 살았던 조선 시대 광주 여성

조선 사회가 받아들인 성리학은 다양한 면에서, 특히 여성의 일상과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은 신유학으로 중국 송의 학자 주희가 새롭게 재해석해 집대성한 유학으로, 신유학에서 여성들은 유교의 조화와 화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양보하고 순종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면서 여성 차별이 심화됐다. 유교의 여성관은 ‘음양론’, ‘남녀유별’, ‘내외관념’, ‘여화론(女禍論)’, ‘여군자론’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 시대 광주 지역은 정치적, 행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전남 지역에서도 나주의 역할에 비해 크게 두드러지지 못했다. 또한 이 지역 출신 인사가 중앙 정계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경우도 드물었고 전국적으로 위세 있는 양반 가문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광주 지역의 가문에 소장된 문서의 양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행적도 잘 기록돼 있지 않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향약을 만들어 지역 사회에 보급했으며,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제재도 가하는 등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시행했다. 여성 교훈서가 지역 내에서 유통 및 보급됐고, 각 가문에서 『소학』을 소장해 이에 따른 여성 교육이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 광주 지역 여성들 가운데 국가적 차원에서 본인의 존재를 인정받은 사례는 지리서와 읍지류에 사회의 귀감이 될 만한 여성들로 수록된 ‘효녀’, ‘효부’, ‘열녀’ 등이다.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에 나타난 광주 지역의 효녀, 효부, 열녀 중 열녀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열녀는 유가적 장의를 시행한 여성, 유가적 제의의 상징물을 지켜낸 여성, 왜란과 호란에서 순절(殉節)한 여성, 수치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여성, 남편을 위해 죽음으로 희생한 여성, 남편을 따라 죽은 여성, 신체를 훼손해 시부모와 남편의 치료에 힘을 쏟은 여성 등의 유형이 확인된다. 이러한 방식 이외에도 여성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봉호(封號)’인데, 외명부 봉호는 총 10등급으로 구분되고 이를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 바로 혼인이었다. 남편이나 아들, 손자를 통해 여성은 봉호를 받을 수 있었고, 여성이 서얼 출신이거나 재혼한 경우에는 봉호를 받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조선 사회에서도 구성원들의 주체적 선택에 따라 다양한 여성의 삶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광주 지역에서도 조선 후기 혼인한 여성이 친정 식구들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신의 가에 전해지는 1746년(영조 22) 기태동이 32세로 사망한 누이동생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祭文)에는 오누이간의 친밀한 정이 드러난다. 또한 이운부의 처 박 씨가 여섯 남매에게 재산을 나눠 준 문서인 분재(分財)의 내용을 통해 조선 후기 아들과 딸을 차별해 재산을 분급하고 가계 계승자인 장자에 대한 상속분이 높아지고 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들, 딸을 구분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나눠 주었던 광주 지역 사례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광주 여성들의 활동을 통해서 여성들이 가사 운영과 자식 교육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던 사실도 드러난다. 직접 관에 청원을 하고 왕에게 상언까지 하면서 집안의 노비를 추심하기도 하고, 홀로 되어서도 당당하게 자식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키는 여성들도 있었다.

『호남효열도』, 22.2 x 32.2 cm, 1937 ⓒ 전남대학교 도서관

격동의 근현대사 속 독립, 민주, 자유를 향한 광주 여성들의 결기

광주는 1896년에 전라남도 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전라도 남부 지방의 중심지였던 나주를 대신하여 전라남도의 중심지가 됐다. 하지만 시내 곳곳에 아름드리나무가 무성하고 논밭으로 뒤덮인 1910년대까지만 해도 인구 1만 명을 갓 넘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었다. 당시 주변의 전주, 나주, 목포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비해 열세였던 광주는 역동적인 근현대사 과정을 거치면서 호남의 대표 도시로 성장했고, 현재 인구 145만이 넘는(2019년 12월 기준) 대도시가 됐다. 현재의 광주의 상황에서 볼 때 불과 100년 전 과거 광주의 모습은 매우 낯설기만 하다.

일제 강점 직후인 1910년대 실시됐던 토지조사 사업으로 농경지를 다량 매입한 일본인과 한국인 소수는 대지주로 성장했으나 대부분의 광주 및 전남 지역 농민들은 소작농의 지위에 국한됐다. 이 시기 전남 지역 등에서 광주로 유입된 인구는 학교 교육을 받기 위하거나 또는 광주 지역 제사 공업과 면직물 산업 등에 취업하기 위한 빈농 출신의 자녀들이었다. 한국 사회는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을 거쳐 1960년대 본격적인 공업화에 착수해 1970년대 중공업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뤘으나 호남은 여전히 저발전 상태에 머물렀다. 특히 대표적인 농업 지역이었던 전남은 값싼 농산물을 공급함으로써 공업과 수출 중심의 경제 성장을 지탱하는 역할을 떠안아야 했고,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아 서울, 경기, 그리고 광주로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1960년대 광주의 인구 증가율은 역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후 1980년대 송정시와 광산군을 흡수해 광주직할시가 됐고, 1990년대 지방자치제의 부활로 5개 자치구의 광주광역시가 되었다. 

한국 사회의 역동적 근현대사 속에서 여러 방면에서 광주 여성들의 주요했던 역할과 활동이 드러난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광주 수피아여고 교사 박애순을 중심으로 여학생과 여교사들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1929년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고보 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발단이 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발적인 봉기가 아니라 1926년 이후 지속돼 온 학생 시위의 경험과 비밀 학생 조직의 조직력에 바탕을 두고 발생한 1920년대 학생 운동의 정점이자 3.1운동 이후 발생한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비밀 학생 결사 ‘소녀회’를 조직해, 사회과학 연구 등 독서회 활동을 통해 항일 의식을 고취해 나갔고, 독립 운동에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기가 됐다. 광주 학생 독립 운동 이후에도 광주여고보 전교생이 백지 동맹을 결행하여 수십 명이 퇴학당했다.

1970년대 광주는 본격적인 산업화를 통해 일신방직, 전남방직, 호남전기, 전남제사, 남해어망 등 제조업 부문의 대규모 사업장에 여성 노동자 계층이 형성됐고, 이곳의 여성 노동자들은 소그룹 학습 활동을 통해 민주노조 결성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70년대 말 노동 운동의 한 축으로 대학생들이 중심이 돼 들불야학 등과 같은 노동야학 활동이 이루어졌고, 송백회와 같은 광주 지역 여성 운동의 독자적인 활동도 있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5.18 민주화 운동 기간 동안 광주 여성들은 시위대에 주먹밥을 날라주거나 시민군을 위해 밥 짓기 등의 보조적 역할뿐만 아니라 가두 투쟁과 보급 활동, 홍보물 제작과 도청 상황실 활동, 항쟁 지도부 형성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러한 활동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성평등한 세상으로의 변화, 그리고 우리의 과제

한국 사회는 해방 이후 서양의 법, 제도가 도입되면서 자유와 평등의 이념 하에 유교 문화에 기반한 남존여비사상, 가부장제 가족 질서가 부분적으로 약화됐다. 헌법에 양성평등을 명시하였으며, 형법의 간통죄에 관한 규정을 남녀 쌍벌주의 및 친고죄로 개정했다가 폐지하기에 이르렀고, 민법의 가족과 상속에 관련한 규정들의 성차별적 요소를 제거하는 개정에서부터 호주제의 폐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한 법, 제도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난했던 여성의 권리 증진 과정은 민주화 운동과 함께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고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하고자 했던 여성 단체들이 출현하면서부터였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법제도를 정비하고 여성 문제를 다루는 기구를 설치했기에 가능했다. 최근에는 기존 여성 정책의 패러다임이 성평등 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 여성 인력 개발과 발전 차원에서의 ‘여성발전법’이 ‘양성평등기본법’으로 개정됐고, 성평등 정책이 지속가능한 사회 구현을 위한 핵심 요소라는 기조 하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성평등 실현을 목적으로 성 주류화 조치, 일과 생활 균형, 성평등 문화 확산을 위한 사업 및 지원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몇 년 전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에 관한 용기 있는 고백은 한국 사회에서 미투(#MeToo) 운동을 본격적으로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문화, 예술, 체육 등의 분야를 비롯해 가족, 학교, 직장 등 사회 각계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들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터져 나왔고, 디지털 성폭력, 불법 촬영 등의 문제도 공론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응 방식보다는 구성원들의 관심은 성폭력으로 인한 여성들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거나 고발하는 데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성희롱, 성폭력은 우리 사회 권력에 기반한 사회구조적 문제이며 사회 구성원의 의식 변화 없이는 개선되기 어렵다. 최근 성희롱, 불법 촬영, 데이트 폭력 등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고소, 고발이나 형사 수사, 재판 절차 과정을 통해 국민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지는 긍정적인 변화가 감지된다.

필자가 광주여성가족재단과 같은 정책 연구 기관에서 일하면서 접하는 어려움 중 하나는 우리 사회가 그간 애써 간과하려 했던 근본적인 문제들에 직면할 때였다. 정책 연구 기관은 어느 한쪽의 주장에 치우치지 않고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진전시키고 사회 구성원 간의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합의점을 도출해 성과가 되도록 정책을 생산해내는 곳이다.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한 증거 기반과 정책 프레임을 정치하게 만드는 곳이어야 한다. 따라서 정책을 연구하는 과정은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그 결과 또한 모두 당연하게 공유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책 연구자는 사물과 현상을 법과 정책을 중심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고 사물과 현상이 놓여 있는 환경 전체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과 현상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과 그들의 삶까지도 관심을 갖고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관점은 물론, 균형 감각도 더해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나아지게 하고자 하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이 있어야 한다. 너무 어려운 길이고 필자에게는 턱없이 모자란 일이다.

지난해 2019년 광주 여성사 연구를 통해 고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광주 여성들의 삶의 궤적과 흐름을 조명하고자 했던 애초 계획의 포부와는 달리 전근대 시기 광주 여성들의 특별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었다. 광주 여성사를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사료가 없었고 근현대 시기가 도래하기 전 광주 지역 역사가 미미했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을 테다. 그러나 그동안 인류 역사상 기록된 것만이 역사가 됐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와 현재의 광주 여성에 대한 기록을 치열하게 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이며 이러한 작업을 위한 노력들이 중요한 일임을 깨닫는다.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라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앞으로도 광주의 옛 흔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한 관심을 저버릴 수 없을 것 같다. 나와 나의 공동체가 성장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터전이 되어 준 광주의 공간, 역사, 문화, 분위기, 그 속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삶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은 광주여성가족재단 발행 『광주여성사Ⅰ(전근대편)』(2019) 보고서 중 일부를 발췌해 내용을 재구성했다.

BIO

고보혜는 현재 광주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이다. 광주성별영향평가센터 센터장(2017),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자문위원(2012),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객원연구원(2009~2011), 전남대학교, 광주대학교, 목포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강사(2008~2011) 등을 역임했다. 주요 연구 및 저서로는 『광주여성사Ⅰ』(광주여성가족재단, 2019), 「헌법상 가족의 보호와 사회보장」(『젠더법학 제7권 제1호』, 한국젠더법학회, 2015) 등이 있다. 전남대학교 법학 학사, 석사, 박사(헌법)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