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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cast

피지 바트: 구술 역사와 인터뷰

By 쿠이쉴레 차란 & 에샤 필레이(더 배드 피지 걸스)

쿠이쉴레 차란 & 에샤 필레이(더 배드 피지 걸스), 〈피지 바트: 2021년 팟캐스트 에피소드, 쿠이쉴레와 에샤,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 가다〉, 2021

녹음: 2021년 2월

출연: 에샤, 쿠이쉴레

 

에샤: (피지어로) 여러분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에샤와 쿠이쉴레, 더 배드 피지 걸스입니다. 이 이름은 어떤 비난도 두렵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저희를 가로막는 게 무엇이든 정복하겠다는 뜻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기르미트야(Girmitiya) 선조를 기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피지 바트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준비했습니다. 모든 에피소드가 저희에게는 특별하고 참여해주신 모든 게스트분들께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도 듣고, 배우고, 즐겨볼까요! 감사합니다.

쿠이쉴레: 반갑습니다, 여러분. 더 배드 피지 걸스의 쿠이쉴레입니다. 피지 바트 팟캐스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특별한 에피소드와 함께 돌아왔는데요. 2월 초 개막 예정인 한국의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될 저희의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에샤, 자기소개 해주시죠.

에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에샤입니다. 새로운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녹음하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는 주로 저와 쿠이쉴레가 나누는 대화, 수다를 듣게 되실 거예요.

쿠이쉴레: [웃음] .

에샤: , 질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기본적인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희가 누군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디서 활동하는지 등을 소개할게요. 쿠이쉴레가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제가 하겠습니다.

쿠이쉴레: 좋습니다. 제 이름은 소개한 것처럼 쿠이쉴레입니다. 저는 뉴질랜드 또는 아오테아로아의 오클랜드 또는 타마키 마카우라우에 살고 있고, 직조공이자 공예가입니다. 그리고 기르미트라고 불리는 계약 노동자에 대한 연구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피지에서 계약 노동자들을 고용하던 시대의 여성의 저항에 초점을 두고 있고, 수공예와 직조가 지식 체계라는 점, 서구권과 학계에서 다루지 않는 우리 역사를 알리는 데에 힘쓰고 있습니다.

에샤: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에샤입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고 있고요. 기리미트 계약 노동자 연구 외에 교육 분야에 종사하고 있고, 최근에는 웹디자인도 시작했습니다. 기르미트 연구에 있어서는 주로 세대 간 트라우마를 다뤄왔습니다. 식민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들, 식민주의 폭력과 그 트라우마가 오늘날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관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석사학위 연구도 배우자나 연인 간 폭력, 알콜중독, 자살 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저희 공동체 기저에 깔려 있는 오래된 문제들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카스트 제도도 그 중 하나이고요. 카스트 폭력이 우리 공동체와 인도 아대륙의 선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계약 노동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플랜테이션에서 일하기 위해 피지로 이주해 온 우리 선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런 트라우마가 식민지 농장에 남긴 것은 무엇인지, 지금까지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쿠이쉴레: .

에샤: , 남인도에서 이주해온 계약 노동자 공동체의 역사와 이야기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공동체이기 때문이죠. 저는 타밀족입니다. 그래서 이런 쪽을 탐구하게 됐고요. 쿠이쉴레는 제가 함께 일을 하게 된 첫번째 피지 후손, 인도 피지인 여성이에요. 이 콜렉티브가 저에게는 첫번째 공식적인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 전에도 소셜미디어 상에서 여러 활동과 연구, 교육 관련 일을 해왔습니다. 여기까지 제 소개였습니다.

쿠이쉴레: 좋아요. 에샤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들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샤: [웃음] 감사합니다.

쿠이쉴레: 그럼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더 배드 피지 걸스는 누구인가?”

[에샤와 쿠이쉴레 모두 웃음]

쿠이쉴레: 왜 이런 이름을 정하게 됐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청취자들께서 궁금해하실 것 같거든요.

에샤: 맞아요. 우선 많은 분들이 저희 이름을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처음에 농담처럼 지었던 이름인데요. 저희가 나쁜 여자나 배드 걸스라고 생각한 이유는 저희가 하는 연구나 작업, 만들어낸 콘텐츠가 많은 반발을 샀기 때문이에요. 저희가 함께 하는 작업 뿐만 아니라 각자 몸 담고 있는 분야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어요.

쿠이쉴레: .

에샤: 저는 인도 피지인 여성으로서, 기르미트 후손으로서 자라면서 나쁜 여자 또는 ‘kharaab’ 여자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Kharaab은 피지 힌디어로나쁜이라는 뜻이에요. 사람들이 흔하게 하는 말이었고 당연히 저희 가족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제가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나쁘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웠어요. 다분히 여성혐오주의적 표현이었죠. 그래서안될 거 없지하면서 말장난처럼 배드 걸스라는 표현을 써볼까 했는데 입에 착 붙게 된 거예요.

쿠이쉴레: 제 생각에는 다른 사람들, 이름을 열거하지는 않겠지만, 계약 노동자에 대해 연구하는 다른 사람들 또한 저희를 그렇게 부른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에샤가 말한 것처럼 단순히 저희 작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죠. 문화적으로 저희에게 붙여진 꼬리표 같은 거예요.

에샤: 맞아요.

쿠이쉴레: 그리고 역사적인 측면도 생각해봤어요. 저희 연구를 보면, 저와 에샤가 저항의 순간들, 기르미트 여성이 이끄는 저항의 순간들을 즐기면서 연구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현대에 여성을 억압하고 수치심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들이 당시에도 똑같이 사용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식민시대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소위 나쁜 여자들과 연대의식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 스스로를 배드 피지 걸스라고 부름으로써 저항 운동을 이끌었던 선조들을 따라다닌 꼬리표를 떼고, 선조의 공을 되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선포인 셈이죠. 그들이 붙인 꼬리표를 뒤집어서 의미를 바꾸는 겁니다.

에샤: 맞는 말이에요.

쿠이쉴레: 지금까지더 배드 피지 걸스라는 이름을 갖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이 이름에 꽂혀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웃음]

에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와 쿠이쉴레를 비롯한 후손들이 하고 있는 연구는 존경성 정치를 타파하려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쿠이쉴레: 그렇죠.

에샤: 저희 작업에 있어서 프로 정신이나 언어 표현, 글을 쓰는 방식도 마찬가지예요. 배드 피지 걸스라는 이름을 두고무슨 말이지?”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거야?” “왜 이름을 저렇게 지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사실 정치적인 의미가 있거든요.

쿠이쉴레: 맞아요.

에샤: 아주 다양한 것들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쿠이쉴레: , 현대의 우리와 예전 선조에게 요구되었던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한 식민시대 개념을 깨뜨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저항 운동을 이끌었던 여성들의 오래된 유산을 담고 있기도 하고,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 이렇게 소소하게 이름 하나로, 언어적 표현으로, 단어 선택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에샤가 말했듯이, 존경성 정치 등 우리 공동체가 많은 것을 강요해왔습니다. 저희가 에세이에도 썼고, 다른 팟캐스트 에피소드에서 게스트들과도 이야기했지만,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예 없던 일로 만들려는 노력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에샤, 역사적 과거 청산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겠어요?

에샤: , 에세이에서 이 내용을 상세하게 다뤘기 때문에 그 일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문제는 학자들이 역사를 전달하는 방식, 또는 독자가 역사를 읽는 방식에 있어요. 물론 계약 노동 관련 폭력 문제는 인정되었지만, 문제는 사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복잡합니다. 계약 노동 자체만 문제가 아니라 이를 기술하는 방식도 문제입니다. 저희는 백인 우월주의에 더하여 카스트 제도와 브라만 우월주의, 인도 당국이 자행한 폭력에 맞서 싸우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백인계 역사학자나 인도인, 아대륙의 상위 계급 인도인이 우리의 이야기를 묘사할 때, 양 쪽 모두가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양 쪽 모두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유럽인들은 우리에게 계약 노동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결론적으로 아대륙의 인도인들도 우리를 지지하거나 도와주지 않았어요.

쿠이쉴레: .

에샤: 이런 식의 과거 청산은 우리 역사의 복잡한 부분을 잘라내 버려서 말이 안되게 만듭니다. 인도 당국과 유럽 식민지 당국에 맞서 싸우던 저항군의 역사 또한 생략하고 있어요. 여기까지 제 생각입니다.

쿠이쉴레: , 설명을 잘 해주셨어요. 저희가 흥분해서 연구 이야기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잠시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말씀드릴게요. 아까 소개할 때 말씀드렸듯이, 이 콜렉티브와 별개로 저는 여성의 저항을 꽤 오래 연구해왔습니다. 여성의 저항은 배드 피지 걸스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여성의 저항은 가려졌지만 우리 역사의 큰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거의 주목받지 못했죠. 고통과 트라우마만 부각된 경향이 있습니다. 식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어떤 이유로 저항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몇 년 전에 고향 방문차 피지에 갔다가 아카이브 문서에서 1920년대 시위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요. 이후 K.L. 길리언의 책에서도 같은 시위에 대해서 읽게 됐습니다. 꽤 오래 전에, 아마 70년대나 60년대에 쓰여진 글 같아요.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서 무슬림이자 인도 피지인 후손인 아메드 알리의 글을 읽게 됐습니다. 80년대 K.L. 길리언의 연구를 토대로 쓴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읽은 것이 마거릿 미슈라의 글입니다. 피지의 여성 운동과 여성 저항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었어요. 계약 노동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대를 아우르는 작가입니다. 1920년대 시위에 관한 이야기도 짧게나마 찾을 수 있었고요. 그런데 제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백인 남성이 쓴 글에서도, 인도 피지인 남성이 쓴 글에서도 기르미트야 여성이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는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거릿 미슈라의 글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제가 아는 한 당시 시위 중 여성의 역할을 인지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비록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긴 했지만요. 해당 글의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나중에 에피소드 설명에 링크를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각설하고, 작년 호주 멜버른에 위치한 세븐스 갤러리에서 전시 기회가 있었습니다. 갤러리에서 프로젝트 전시를 제안했고 마침 저는 에샤의 웹페이지 @coolie_returns를 통해서 에샤와 연락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 웹페이지를 얼마나 오래 운영하셨죠?

에샤: 아마도 2~2년반 정도였던 것 같아요.

쿠이쉴레: 저는 에샤가 우리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흥미를 갖고 있었어요. 역사의 복잡성과 중요도 측면에서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피지에서는 카스트 제도는 논의되지 않고 있습니다. 피지에서 카스트 제도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과거에 우리 선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이 논의되지 않고 있죠. 카스트 제도는 인도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도인들이 이주해올 당시 배 안에서 카스트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피지에 카스트 제도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한 에샤의 작업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정확하게 복잡성과 중요도를 다루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세븐스 갤러리에서 프로젝트를 제안 받았을 때 바로 든 생각이 에샤와 함께 작업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먼저 메세지를 보냈고 에샤가 응했기 때문에 저희가 함께 하게 됐습니다.

에샤와 쿠이쉴레: [웃음]

에샤: 처음에 세븐스 갤러리 프로젝트가 어떻게 성사됐는지 설명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쿠이쉴레가 저에게 전시와 연구에 대해서 제안하기 전에 저희는 딱 한 번 만난 상태였습니다. 피지에서 한 번 만났죠. 피지에서 돌아온 후 집에 있다가 쿠이쉴레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전시에 대해서 들었어요. 먼저 말씀드릴 것이 제가 예술 분야에서 실제 작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쿠이쉴레가 작업하는 직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피지에서 만났을 때 작업에 대한 설명을 들었거든요. 쿠이쉴레에게 작품이 어떤 의미인지, 가족의 역사라든가 작업을 하는 이유 등에 대해서요. 쿠이쉴레의 작품에 정말 매료되었습니다. 저도 자라면서 수공예와 직조를 자주 접했고, 저희 가족 중에도 공예를 하시는 분들이 있고요. 저는 직접 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저와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이 설레었고 더 많은 것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전시도 솔직히 정말 좋은 기회였습니다. 또 다른 인도 피지인 여성, 또 다른 후손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였죠. 그런 기회는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수락했습니다. 정말 협업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인스타그램 계정 @coolie_returns를 혼자 운영했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다만 이 계정의 내용은 저만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사람들, 제가 대화하고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들의 것이죠. 이런 부분이 저의 정치관을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웹페이지에 컨텐츠를 올리는 등 운영을 제가 혼자 하다 보니 항상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해보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작업 수준도 높아질 것 같았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과 중요한 무언가에 대한 관점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쿠이쉴레: .

에샤: 저는 예술 쪽으로 일을 해본 적도 없고 갤러리와 협업한 적도 없지만, 이 제안은 피지 후손의 역사를 공유하는 누군가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졌습니다. 제 주요 분야가 아니었던 저항의 역사도 새로웠고요. 저는 주로 제 가족이나 제가 속한 공동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연구를 했거든요. 쟁의, 노동 권리, 식민주의 투쟁의 맥락 속에서 정치적 저항을 연구하는 건 저에게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 이런 역사에 대해 배우는 것도 매우 신선했습니다.

쿠이쉴레: 지금 되게 중요한 얘기를 해주셨어요. 이 프로젝트를 하기 전에 피지의 저항 운동에 대해서, 특히 여성 선조가 이끈 저항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알아본 적이 있었나요?

에샤: 아니요. 이것도 문화적인 요소인데요, 자라오면서 저희 가족 중에 여자들이 상당히 목소리가 크고 강인하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런 특징을 오랜 저항의 역사와 연결 지을 생각은 못 해봤습니다.

쿠이쉴레: 제가 생각할 때 저희 콜렉티브와 연구 프로젝트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이 연구 프로젝트가 결국 콜렉티브로 규모가 커졌죠. 저희에게 중요한 점은 좀 다른 역사, 다른 이야기를 후손에게 들려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희 역사는 비단 이주, 트라우마, 폭력으로만 점철된 것이 아닙니다. 거대 시스템을 중단시킬 만큼 대단한 일을 해낸 선조들이 존재했습니다. 아직 저희가 알아가는 중이고 여전히 연구하고 집필할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이렇게 모여서 실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여성의 업적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기르미트에 대해 알려진 일반적인 역사와 이야기에만 집중하지 않고요.

에샤: 맞아요.

쿠이쉴레: 역사를 다루는 문학이나 학문과는 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역사가 일반화되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복잡한 부분들을 다루지 않아요. 에샤가 하던 작업만 봐도 그래요. 지식 생산 방식의 서구적 개념이나 사상, 일반적인 역사를 벗어나서 연구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에샤: 그렇죠.

쿠이쉴레: 그 점이 우리가 함께 이 프로젝트를 하는 가장 큰 의의인 것 같습니다. 공동작업을 통해서 주류가 아닌 역사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것이죠.

에샤: 맞습니다.

쿠이쉴레: , 조금 횡설수설이지만, 할 말은 다 했네요. [웃음] 이제 빠르게 에샤가 언급했던 저희 공동작업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콜렉티브의 묘미는 내가 어떻게 작업에 기여하고, 내 작품이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는가 같아요. 결국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죠.

에샤: .

쿠이쉴레: 그리고 이 연구와 집필, 에세이를 끝마치고 나서도 공동작업 결과물의 의미가 저희에게 와닿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습니다. 정말이지만일 제 가족이 듣고 있다면 죄송하지만, ** 멋있었어요.

에샤: [웃음] 그 에세이는요, 저도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쿠이쉴레: [웃음]

에샤: 도대체 어떻게 저희가 그런 대단한 에세이를 고작, 따지고 보면 연구부터, 계획, 협업까지 1년 정도 걸렸죠.

쿠이쉴레: 맞아요.

에샤: 그렇지만 실제로 글을 쓴 시간만 따지면 아마 두 달 정도 될 거예요. 말도 안되죠.

쿠이쉴레: 그리고 이런 역사 프로젝트의 경우에 사람들은 결과물만 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봐요. 그러니까 제 말은 사람들이 보는 건 최종물이란 말이죠. 거기에 들어간 노력은 보지 못해요. 말씀하신 대로 정말 많은 연구가 선행됐어요. 이런 부분이

에샤: 맞아요.

쿠이쉴레: 저와 에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역사의 복잡한 부분을 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에세이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많은 회의를 거쳤어요. 피지 인도인 후손의 흥미를 끌어서 글을 읽게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길 바랬습니다. 그러다 보니 에세이를 쓰면서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어야 할 것 같아서 계속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어떤 내용을 포함시킬지 결정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사람들이 복합적인 역사, 특히 1920년대 노동쟁의와 그와 관련된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재료와 도구가 필요할까를 고민한 시간이었습니다.

에샤: , 그렇습니다. 그리고 연구와 에세이를 진행하면서 한 건의 시위가 얼마나 많은 사안들과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그런데 역사 기술에는 빠져 있는 부분들이죠. 카스트 제도, 우리 선조가 겪었던 상위 카스트의 폭력, 식민시대에 사용된 계략 등과 연관되어 있어요. 쿠이쉴레가 다른 팟캐스트 에피소드에서 언급한 적 있는데요, 남성의 시위와 여성의 저항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셨죠. 그 차이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을까요?

쿠이쉴레: , 흥미로웠던 점이 피지에서 계약 노동 또는 기르미트가 시작했을 때부터 시스젠더 남성과 그 외 피지 사람들의 차이가 두드러졌습니다. 시위대를 모으는 방식이나 저항 방식에 있어서요. 기르미트야 남성의 방식은 기르미트야 여성의 방식만큼 물리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물론 계약 노동제 하에 모두가 억압 받고 있었지만, 이 시스템 안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다른 방식으로 결집할 수 있었고, 다른 선조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이 남자들에게는 주어졌습니다. 계약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저희가 언급하고 강조하고자 하는 점인데, 모든 사람들이 각자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계약 노동자로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특히 여성 이주자는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었습니다. 남성 노동자의 성적, 가정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농장에서 일하면서 무료 가사노동도 제공했습니다. 이렇듯 여성은 더 억압 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더 심한 물리적, 정신적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항도 물리적 성격을 띄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죠. 서한을 쓰거나 의회에 찾아가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습니다. 남성 노동자가 누리던 존중을 여성 노동자는 받지 못했습니다. 에샤,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나요?

에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성이거나 시스젠더 남성이 아니었던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특정 형태의 폭력에 관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이미 성적, 식민주의 고정관념의 굴레가 씌워져 있었습니다. 이들을 피지로 이주시킨 이유만 봐도 그래요. 신민지 플랜테이션에서 이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가정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용어가 뭐였죠? 핵가족?

쿠이쉴레: 피지 계약 노동자를 연구하면서 흥미로웠던 것이 식민지 권력자들이 이성애 가부장제와 이성애 규범성을 우려했다는 점입니다.

에샤: 그랬죠.

쿠이쉴레: 식민지 제국은 여성을 이용해서 농장의 모든 사람들이 핵가족이라는 개념을 수용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열악한 환경에, 대부분 사람들이쿨리 라인이라고 불리는 좁디 좁은 오두막에 살고 있었거든요. 서구 조합 밖에서 이뤄지는 혼인은 없었고 있었더라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피지의 여자들은 여러 명의 파트너와 관계를 가졌고, 인도 아대륙에서 그랬던 것처럼 브라만 이성애 가부장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핵가족이라는 개념을 계약 노동자들 사이에 도입해서 인구를 순종시키고 통제하려고 했던 겁니다.

에샤: .

쿠이쉴레: 노동 인구를 통제하려고 한거죠. 그리고 당연하게도 핵가족 도입이나 이성애 가부장제 도입에 있어서 따르는 폭력의 첫번째 희생자는 여성이었습니다. 식민지 권력자, 농장 노동자나 기르미트야 남성들로부터 폭력을 당했습니다. 제 생각에는여기에 더 하실 말씀 있나요?

에샤: [웃음]

쿠이쉴레: 핵가족에 대한 나름의 설명이었습니다.

에샤: , 감사합니다. 한 가지 보태고 싶은 말은, 이성애적 핵가족을 강요한 것은 결국 우리 선조들이 계속 일을 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거예요. , 노동 착취를 지속하기 위한 것이었죠. 하지만 그런 시도는 저항 때문에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어요. 이 부분이 저희 작업과도 연결이 되는데요. 쿠이쉴레가 팟캐스트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바로 역사적 처벌과 연관이 있습니다.

쿠이쉴레: 그렇습니다.

에샤: 그리고 여자를 나쁘다고 수식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선조의 저항 때문에 왜 우리가 지속적으로 비난 받아야 하는지도요. 결국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쿠이쉴레: 생각해보면 참그동안 배워온 역사적 이야기를 거꾸로 생각해보면, 인도 피지인 여성 후손으로서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깜짝 놀랄 만큼요.

에샤: 맞아요.

쿠이쉴레: 멋있죠. 이 얘기는 에세이에서도 다뤘는데요, 시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여성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말이 굉장히 와닿았어요. 기억나는 대로 말해보면, 이 여성이 경찰관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방식대로 할게요.” 이 한 마디가 굉장히 강력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은 그들을 노동자로 구속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신체를 포함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체계 하에 살고 있었잖아요. 그러니 아카이브 신문기사에 명료하게 남아있는 이 한 마디를 발견한 순간, “제 방식대로 할게요이 한 마디를 만난 순간 엄청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일부를 재발견해서 선조들이 보여준 힘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는 점이 감사한 것 같아요.

에샤: , 맞습니다. 쿠이쉴레, 제가 딱 한 마디 더하고 싶은 것은 저도 그 한 마디가 정말 정말 좋았다는 거예요. 굉장히 강력하고 또 용감한 한 마디였다고 생각해요. 정말 용기있고 대담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쿠이쉴레: .

에샤: 한편으로는 이 말이 우리 공동체, 특히 오늘날 여성을 대변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도 피지인 여성은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해하는 식의 고정관념이 존재합니다. 그런 고정관념은 사실 우리 선조들의 생활 방식이나 행동, 저항과도 맞지 않아요. 이 말 한 마디가 우리 선조가 얼마나 용감하고 대담한 사람들, 여성이었는지 일깨워주고 있어요.

쿠이쉴레: 맞아요. 그 말 한 마디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아카이브 속에서 찾은 그 말 한 마디가 여성을 대변한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설명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기 때문이죠. 우리를 앞선 여성들이잖아요. 대단한 방식이든 가정 안에서 소소한 방식이든 그 분들이 적극적으로 저항을 위한 논의를 이어 나가신 거죠. 이 모든 것이 현대 여성의 모습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에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쿠이쉴레: 겸손해지네요.

에샤와 쿠이쉴레: [웃음]

에샤: 진짜 멋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역사를 배울 때 이런 것들이 우선순위는 아니잖아요. 아카이브 문서이든 어떤 글이든 자료를 모아서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고 현대로 끌어낸다는 것이 굉장한 일인 것 같아요.

쿠이쉴레: 계약 노동 시대 기르미트야 여성을 대변하는 건전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충분히 대변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이야기와 강인함, 용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이 공동체를 위해 보여준 사랑과 관심도요. 1920년 시위에서 있어서 제일 멋있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관심과 정성이었다는 점이요.

에샤: 맞아요. 이제 다음으로 저희 팟캐스트 청취자 여러분과 꼭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 콜렉티브의 중요한 부분인 쿠이쉴레의 직물, 수공예, 그리고 관련 역사입니다. 우선 어떤 직물 작품이 비엔날레에 전시될 예정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쿠이쉴레: . 믿기지 않지만 총 다섯 점의 직물이 전시될 예정입니다. 직물 네 점 중 하나는 시위 배너, 하나는 자수품, 두 점은 더 큰 연구 프로젝트주린 배를 만족시키기엔 부족하다의 일부였던 아카이브 문서입니다. 네 점 모두 광주 비엔날레에 전시될 거예요. 그리고 그 보다 오래된 작품 하나가 포함되었는데요. 2018년에 작업한사탕수수 밭에서 비탄에 젖어라는 작품입니다. 피지 박물관에서 기증받은 아카이브 이미지를 모은 것입니다. 피지 박물관에 감사합니다! 아카이브 이미지와 연관된 식민주의 폭력을 연구해보고 싶었어요. 그 당시 사진이라는 것도 식민주의 통제를 받던 대상이었으니까요. 사진은 식민지 제국이 피지배국을 기록하고 정의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조, 특히 기르미트야 여성이 그런 프로젝트의 일부였죠. 예를 들어서, 아카이브 이미지들은 제국으로 보내는 엽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 이미지들은 우리 후손들이 선조를 만나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됐죠. 우리가 가진 유일한 매개입니다.

박물관에서 아카이브 이미지를 받았을 때, 여자 후손인 제가 이 이미지를 직물 위에 작업하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손으로 직접 작업을 했고, 이 사진을 찍을 때 여성들이 받지 못했을 사랑과 정성을 담아서 만들었습니다. 직물 배너 길이가 무려 11.4미터나 됩니다. 저도 제가 어떻게 염색하고 작업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만큼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에샤와 쿠이쉴레: [웃음]

쿠이쉴레: 배너가 큰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여성들이 피지 역사에 남긴 영향력과 흔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크기입니다. 여성들은 우리 공동체의 시초입니다. 제가 후손으로서 선조들에게 가지는 애정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이런 것들을 대형 사이즈 배너에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이 직물 작품은, 사실 모든 직물 작품이 에코 염색 또는 천연색소 염색 과정을 거칩니다. 어떤 직물은 식물을 이용해서 염색하고 또 다른 직물은 식물에서 추출된 염료로 염색합니다. 실크스크린, 핸드 카빙, 리노컷, 우드블럭 프린트도 들어가고, 아플리케도 들어가고, 정말 많은 기법이 사용됩니다. 그 외 아카이브 문서와 이미지도 들어가죠.

직물 공예를 배운 것이 저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아지(Aaji), 친할머니로부터 공예와 직조를 배웠습니다. 제 이름도 할머니 이름을 따서 할머니와 이름이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름을 지을 때부터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믿어요. 그리고 제 주변에는 늘 직조공과 공예가들이 있었어요. 가족 중에 여자들이 직조와 공예를 했습니다. 저희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이죠. 우리 가족의 지식 체계이고요. 공예와 직조는 따라서 저희에게 큰 의미를 가집니다. 저희가 공간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방식이자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뭔가 만들어 준다든지 어떤 식으로 축하해준다든지

그렇다보니 저희 가족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이불을 만들어주거나, 자수를 뜬다거나, 옷을 만드는 전통이 있습니다.

에샤: 그렇군요.

쿠이쉴레: 저한테는 역사적 뿌리라고 할 수 있죠. 계약 노동, 기르미트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그 뿌리를 실현하는 것이고, 특히나 여성의 저항을 노동과 연결 짓고 존경을 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희의 유산인 수공예를 실천함으로써 선조를 기리고자 합니다. 수공예는 저뿐만 아니라 저희 가족에게 문화적 의미가 큽니다. 모든 인도 피지인에게도 마찬가지이고요. 손으로 하는 노동을 존중하고 인정함과 동시에 계약 노동 시절 여성의 노동을 인정하고 설명하는 거예요.

저에게 있어서 직물은 소통의 방식입니다. 저희 콜렉티브도 그렇지만 저 스스로에게도 접근성이 매우 중요했어요. 그리고 제가 자라면서 문학이나 글을 통해서 기르미트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다시금 트라우마가 생기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후손으로서 역사를 바라볼 때 트라우마를 느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후손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런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거기서부터 직조를 통해 계약 노동자 이야기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역사를 전달하는 아주 건전한 방법이라고 확신합니다. 거의 모든 피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소통방식이고요. 어떤 식으로든 어떤 형태이든 직조와 공예를 경험하면서 자랐을 테니까요.

에샤: 맞아요.

쿠이쉴레: 가족 중에 어르신이나 먼 친척을 통해서 경험했을 거예요. 에샤도 직조와 공예가 늘 가까이 있었다고 말했죠.

에샤: .

쿠이쉴레: 그래서 후손들이 쉽게 알아보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했습니다. 작품 속에서 정체성과 역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랬죠. 역사 속 고통과 트라우마에 집중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와 선조, 어르신들, 노동, 우리의 역사를 기념하고 축하하길 바랬습니다. 공동체를 지켜온 사랑과 정성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이자 저의 사랑과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사랑과 정성으로 우리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우리를 있게 한 유구한 유산에 기여하는 저의 방식입니다. 작품 설명이 길어졌네요. 이제 잘 아시겠지만 직물 공예는 저한테 의미가 정말 큽니다.

에샤와 쿠이쉴레: [웃음]

에샤: 가족과 가족의 전통을 존중하는 정말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우리 역사를 다시 기술할 때 이런 것이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조와 여성 가족의 유산을 기리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도 우리 공동체에서 여전히 중요하고 활발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도 피지인 공동체에게 가치 있는 것을 보존하는 방식이기도 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공예의 과정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어떻게 천을 염색하는지도 몰랐거든요. 실크스크린이나 자수도 그렇고요. 쿠이쉴레가 세븐스 갤러리 전시를 위한 작품을 끝냈을 때도 직물 하나 완성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노동이 들어가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1년 반 정도 지난 지금에서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도대체 쿠이쉴레는 세븐스 전시 때 직물 네 점를 어떻게 만들어낸거지?’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완전히 와닿지는 않는 것이, 정말 방대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더라고요.

쿠이쉴레: 매우 특별한 노동의 한 형태이죠. 솔직히 말하면,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에세이가 그렇듯이, 사람들은 최종물만 보잖아요. 벽에 걸린 직물만 보지, 거기에 들어간 온갖 노동은 알지 못해요. 게다가 투입된 지식은 저만의 것이 아니에요. 세대를 거쳐서 저한테 전래되어 온 지식이에요. 그리고 제 작업을 위해서 저희 가족이 보여준 지지와 사랑을 정말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제가 작업하는 내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창작 과정의 우여곡절을 모두 함께 해주셨죠. 그리고 실수했을 때는 바로 할머니께 도움을 요청하고 했어요. [웃음]

에샤: 그랬죠.

쿠이쉴레: 직물 작품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참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 선조가 피지로 이주해 오기 훨씬 오래 전부터 우리 공동체에 존재했던 전통과 풍습이 담겨있으니까요. 당연히 피지의 환경에 영향을 받고 변형된 부분도 있겠죠. 이런 전통과 기술을 탐구하고 실험해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현대에도 전통을 유지한다는 점이 좋았고요.

직조와 공예를 하면서 또 좋았던 점은요. 현대 예술을 배경으로 보면, 여성의 노동은 여전히 예술계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공예는 특히나 현대 예술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예술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현대 예술에 집중되어 있어요.

에샤: 맞아요.

쿠이쉴레: 그렇다보니 탐구하기 상당히 어려운 분야였습니다. 일일이 설명을 요구하면서 지속적으로 확답을 구하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작품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다고 했을 때 정말 신났습니다. 공예품, 직물이 전시된다니. 게다가 어떤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한 문화의 지식과 역사가 담겨있는 물건이잖아요. 저와 우리 가족, 그리고 피지의 후손들이 공유하는 가치가 담긴 작품입니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런데 이 작품들이 전시된다니. 13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제 작품을 선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거짓말 같기도 했죠. 우리 역사가 대한민국에 전시된다니! 엄청났죠. 저희 가족에게도 확신을 주게 됐어요. 처음에는너가 무슨 예술 쪽에 진출해서 직조랑 공예를 한다는거니하셨거든요. 이해하기 어려우셨겠죠.

에샤: 그렇죠.

쿠이쉴레: 가족들은 원래 제가 화이트컬러 직종에 종사하길 바라셨어요. 그런데 이제는 제 작업의 의미를 이해하십니다. 우리 가족이 이어온 노동과 전통을 기리는 일이라고요.

에샤: .

쿠이쉴레: 제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멋진 것 같아요. 특히 집에서나 가족 중에 어르신들이, 또는 피지의 여자들이 우리 작품을 보고내가 어릴 때 하던 건데하는 말을 듣는 것이 가장 뿌듯합니다.

에샤: 맞습니다.

쿠이쉴레: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무언가 공유하는 좋은 방법이에요.

에샤: .

쿠이쉴레: , 그리고 또 제 생각에, 좀 오그라들 수도 있지만, 직조와 공예는 사랑과 정성을 전하는 굉장히 방대한 지식 체계라고 믿어요. 제가 물려받은 것들을 이어나가고, 공동체의 적극적인 일부가 되면서 또, 우리 전통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정말 보람찬 일입니다.

에샤: 저도 공감해요.

쿠이쉴레: 오그라든 손발을 펴도 돼요.

에샤와 쿠이쉴레: [웃음]

에샤: 그리고 어떻게 될지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저희 배드 피지 걸스가 직접 한국에 가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쿠이쉴레의 실물 작품은 비엔날레에 전시될 겁니다. 기회가 되거나 관심 있는 분들께 꼭 관람해보시라고 추천합니다. 그리고 이 팟캐스트도 듣게 되신다면 작품이 어떻게 완성됐는지, 어떤 노력이 들어갔는지, 작품의 역사적 의의와 쿠이쉴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 배경지식을 갖고 감상하실 수 있을 거에요.

쿠이쉴레: , 고맙습니다. [웃음]

에샤: .

쿠이쉴레: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저희 콜렉티브에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 수공예라는 노동을 통해서 다른 형태의 노동을 표현했다는 점이에요.

에샤: .

쿠이쉴레: 제가 저희 작품에서 가장 애정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여러분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에샤와 쿠이쉴레: [웃음]

에샤: 맞는 말이죠. 에피소드를 마치기 전에 정리하는 차원에서 저희가 누구인지, 왜 함께 작업을 하게 됐는지로 돌아가 볼게요. 저희가 만나기 전에 각자 하던 일, 그리고 우리가 협업했거나 자문을 구했던 각기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이 이 콜렉티브에 모두 담겨있다고 생각해요. 에세이도 쓴 내용인데요, 오랫동안 우리 공동체 안에 존재해온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인정하고 그 지위를 보존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쿠이쉴레: .

에샤: 있는 그대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거죠. 그러니까, 모르겠네요, 너무 미화하거나 다른 얘기로 세는 것 같기도 한데요.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죠. 요즘 세상은 여러가지 형태의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런 걸 뒤집어 보자는 취지가 저희 콜렉티브에 들어있어요.

쿠이쉴레: .

에샤: .

쿠이쉴레: , 맞아요. 이렇게 마주 앉아서 우리 콜렉티브와 연구에 대해서 세세하게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청취자분들께서 꼭 시간을 내서 저희 웹사이트도 방문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피지 인도인 역사와 저희가 작업을 통해서 파헤치고자 하는 여러가지 억압과 구조적 폭력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저희 팟캐스트를 찾아 주시고요. 에세이도 읽어 보길 추천합니다. 저희가 팟캐스트에서 너무 깊은 내용은 다루지 않았는데요, 스포일러 방지 차원이었다고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에샤: [웃음] 저희 웹사이트에 방문하시면 저희 작업과 관련된 모든 링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소는 badfijigyals.com 입니다.

쿠이쉴레: 기억하기 참 쉽죠. [웃음] 그럼 이만, 감사합니다, 청취자 여러분! 오늘 작품과 연구 설명에 함께 해준 에샤에게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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