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계 미국인 작가 파시타 아바드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와 사상이 녹아 있는 작업을 해오며, 문화적 어휘와 주관적인 정치적 경험, 시민 투쟁 간의 역동적인 관계를 구상한 범세계적인 페미니스트였다. 아바드는 한국의 수묵화와 아프리카의 가면, 구자라트와 라자스탄의 거울 자수, 인도네시아 이카트와 와양의 꼭두각시 인형, 파푸아 뉴기니 조개껍데기 장식 등 다양한 기법을 배우고 샘플링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추상에 대한 독특한 접근 방식을 발전시켰다.
아바드는 1969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 정권과 부정 선거에 반대하는 시위에 연루돼 필리핀을 떠나게 되면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남편인 개발경제학자 잭 개리티와 함께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대만, 홍콩을 히치하이킹으로 1년간 여행하며 섬유 예술과 재료 연구, 토착적 생활 방식에 대한 작업과 연구를 발전시켰다.
그녀가 발전시킨 독특한 작업으로 1970년대 후반에 시작한 대형 ‘트라푼토’ 회화가 있는데, 이는 단추, 스팽글, 프린트 직물, 조개, 비즈 등 일상에서 발견한 여러 재료를 서사적으로 엮어 퀼트 기법으로 작업한 것이다. 〈100년의 자유: 바타네스에서 홀로까지〉(1998)는 대형 벽걸이 작품으로 수세기에 걸친 스페인 식민 통치에서 살아남은 필리핀 전통과 건축, 공동체의 다양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필리핀의 독립을 기리는 작업이다. 〈생명의 문〉(1998)은 아바드가 예멘의 수도 사나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달동네, 시장, 예배당, 오래된 마을을 유심히 관찰하고 강철, 나무 조각품, 스테인드글라스, 심지어 흙과 짚으로 만든 가마리야 창문과 출입구를 정교하게 스케치해 작업한 회화 연작이다. 이 문들은 내부적 주체와 사회적 건축의 문턱을 낮춰주는 것이자 현재 내전을 치르고 있는 지역으로 통하는 상상의 관문을 의미한다. 〈불가능은 없다〉(2000)는 인도, 특히 라자스탄을 여행하면서 거울 작품과 자수, 은장식, 기하학적 스테인드글라스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이다. 〈혼란〉(1991)과 〈흰 색은 감각의 인식을 고조시킨다〉(1998)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느낀 애통함을 포함해 작가가 좋아하는 블루스와 재즈 음악의 청각적 여운과 정치적 투쟁의 역사에 얽힌 감정적 질감을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