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30년이면 어느 정도 잊히지 않았을까? 한 세대를 넘어서는 시간이 지났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 판단은 곧 무색해졌다. 2009년 27명 여성들의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은 공포와 경악, 분노와 안타까움, 회피와 침묵, 절망과 울부짖음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들에게 5.18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무엇이 이토록 이들을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울부짖게 만드는가.
40년 전 5월 광주는 고립무원이었다. 외곽 지역은 바리케이드로 차단됐고, 전화선은 끊어졌으며, 생필품 같은 물자조차 들여올 수 없었다. 5월 18일, 진압봉과 대검으로 시작된 계엄군의 진압은 19일부터 총, 헬기, 장갑차를 장착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을 희생시켰다. 도시는 아수라장이 됐고, 병원은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화려한 휴가’. 이 참혹한 인간 사냥에 계엄군이 붙인 작전명이었다.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군’은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결국 21일 오후 계엄군은 시내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21일부터 26일까지 그 유명한 ‘시민자치공동체’가 열렸다. 흔히 ‘해방기간’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 광주에서는 공권력 대신 시민 권력이, 무질서 대신 시민 자치가, 파괴와 약탈 대신 시민적 우애와 연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5월 27일 새벽, 컴컴한 하늘에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날, 광주시민 어느 누구도 잠들지 못한 채, 도청을 주시하며 그 고통스러운 마지막 유언을 듣고 있어야만 했다. 새벽 4시, 시민군과 계엄군 간의 1시간 교전 끝에 상황은 끝났다. 이날 도청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 통한의 열흘 동안, 여성들은 도처에 있었다. 도청과 YWCA를 거점으로, 여성들은 가두방송, 유인물 제작과 배포, 대자보 작성, 부상자 간호 및 수송, 대민업무, 모금과 취사, 시신처리, 장례 준비 등의 활동을 도맡아 진행해 나갔다. 거리에서는 나이 어린 여학생들이 폭증하는 부상자들 치료에 필요한 헌혈을 호소했고, 수많은 성매매 여성들은 기꺼이 헌혈에 동참하는 동시에 시신 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주부와 시장 상인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먹였다. 시위 대열의 3분의 1이 여성들일 만큼, 모든 계층을 망라한 여성들이 가두 투쟁에도 대대적으로 참여했다.
여성들이 전방위적으로 참여했던 만큼 피해도 참혹했다. 항쟁 기간 동안 여성들은 백주에 옷이 벗겨진 채 기합을 당하고, 가슴이 대검과 총탄에 잘려나갔으며, 후미진 골목 곳곳에서 성폭행에 유린당하고, 임신 8개월의 여성조차 총탄에 숨져야만 했다. 항쟁 직후, 구속된 여성들은 무차별적 구타와 고문을 밤낮 가리지 않고 당했으며, 일부 여성들에게는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든 성고문까지 자행됐다. 전시 상황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들이 법치국가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여성들의 몸은 그 폭력에 무방비로 점령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 여성들의 모든 ‘몸’이 그 자체로 ‘항쟁지도부’였다는 사실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거리로 나온 몸들. 헌혈하고 돌아오다 죽은 여고생의 몸, 청년을 숨겨준 대신 시뻘건 피멍을 기꺼이 감당했던 할머니의 등허리, 마지막 밤 새벽까지 울리던 가두방송의 목소리, 좌판 대신 솥을 내걸었던 여성 상인들의 손, 리본을 만들고, 대자보를 쓰고, 시위대를 위해 자갈돌을 깨고, 시신을 염하던 그 무수한 손들, 그리고 고문과 구타로 얼룩진 몸까지, 모든 몸들 하나하나가 항쟁지도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