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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진공(眞空)의 역사를 채우는 생명의 시선

By 정경운

진공의 언어

제주의 4월은 눈부시다. 한라산 중산간의 대평원을 뒤덮고 있는 그 환한 유채꽃들의 흔들림은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 일쑤다. 그러나 어쩌면 그 흔들림이 수많은 영혼들의 서글픈 몸짓일 수도 있다는 걸 몇 사람이나 볼 수 있을까. 

제주의 별칭은 ‘세계평화의 섬’이다. 2005년, 이 이름을 준 「세계평화의 섬 지정문」엔 “제주 4·3사건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킨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70여 년 전, 눈부신 유채로 흔들리는 그 시간에 제주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1948년 발생한 제주 4·3사건은 사망과 실종자를 포함해 2만 5천~3만여 명의 희생자를 낸,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던 비극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촉발됐던 이 사건은, 정작 남로당 지도부가 월북해버린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이를 반란 사건으로 규정, 제주도민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됐다. “제주도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갖고 있다”는 오명을 들씌우며 시작된 토벌 작전은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풀릴 때까지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을 희생시키고서야 끝났다. 그리고 이후 이 사건은 2000년대 들어 ‘특별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이 ‘국가 폭력’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기 전까지 ‘없었던 역사’로 50여 년이라는 야만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있는 가시리 주민들에게 4·3사건은 ‘미친 세월’로 기억된다. 1948년 가을 중산간에 소개령(疏開令)이 떨어지자, 가시리에 토벌대가 들이닥친다. 이들에 의해 마을이 불태워지고, 주민들 일부는 산으로, 일부는 아랫마을로 피신했다. 하지만 아랫마을로 피신한 주민들은 곧 학교와 창고에 집단 수용된다. 토벌대는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부재한 집을 골라내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했고, 이들 중 15세 이상이 되는 사람을 모두 끌고 가 총살했다. 이를 ‘대살(大殺)’이라 불렀다. 이때 희생된 주민은 500여 명으로, 당시 가시리 인구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다.

제주도 가시리 ‘4.3 애기무덤’. “그 여자는 행인들에게 다가가서 … 지나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는 … 이렇게 말했어. ‘우리 애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게. 누구 이야기붜 할까?’ 다들 여자를 피했어. 그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거야….” 스베를라나 알레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중에서

가시리에는 그 야만의 시간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애기무덤’이 있다. 마을이 불태워지던 시간, 갓난아이들을 수습하느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이후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은 어미와 두 아이들이 사망한 그 자리에 그대로 무덤을 만들어준다. 어미의 몸체를 닮은 큰 무덤과, 옅은 바람에도 금세 흩날릴 것 같은 애잔한 2개의 무덤. 아이들은 생전에 미처 다 빨지 못한 젖을 잊지 않으려는 듯, 그대로 어미의 젖가슴이 됐다.

이제 마을에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다. 이름도 없는 여인, 이름도 없는 아이들, 그리하여 목소리도 없는 무덤. 그러나 그녀는 젖가슴처럼 매달린 아이들을 품은 채 기어이 자신의 목소리를 만들어 내고야 만다. “나 여기 있노라고, 한때는 은어처럼 펄떡이는 여자였노라고, 그리고 두 아이의 어미였노라고.” 그렇게 무덤은 그녀의 몸이자, 목소리이자, 역사적 존재로서의 실체가 됐다. 

나는 이 ‘애기무덤’을 2010년 가시리 마을조사를 하면서 만났다. 이 당시 나는 광주 여성들에게 5·18 민주화운동에 얽힌 경험을 묻는 인터뷰를 마치고 출판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목소리도 없이 무덤으로 남은 제주의 여성과 수많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지만 침묵하거나 혹은 침묵당해야 했던 광주의 여성. 이 기괴하고도 묘한 병치는 나를 아득한 느낌으로 이끌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한 여성을 소환해냈다. 

언어를 초과하는 몸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2003년 4월이었다. 앞서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한 신문 기사 덕분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서 찍은 흑백 사진이었지만, 조그만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눈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그 기사의 제목이었다. 

신문 기사를 단서로, 여기저기 수소문해 어렵사리 그녀와 연락이 닿았다. 몇 번의 거절과 설득을 반복, 겨우 만남만을 허락받았다. 이전의 인터뷰들이 자신의 얘기를 왜곡했다는 생각에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나 또한 생애사는 포기하더라도, 한 번 만나기라도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선, 인천 나사렛 병원 6인실.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환자의 나이와 병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시사 잡지와 신문들이 침대 테이블 위에 널려 있었다. 긴장과 탐색으로 가득 찬 눈빛. 나를 보는 그녀의 시선이었다. 

그 긴장의 끈이 풀어진 것은, 내가 ‘광주’에서 왔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곧바로 그녀의 입에서 ‘광주민중항쟁’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후 약 1시간 동안, 나는 그녀에게 27일 밤 도청에서 죽은 내 가족과 이후 남은 가족들이 치렀던 고통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다. 고통에 대한 교감 덕분이었는지, 생애사 인터뷰는 의외로 쉽게 허락됐다. 그리고 그해 6월, 이틀에 걸쳐 정순덕의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했다. 1년 뒤인 4월, 그녀는 사망했다.

1933년 경남 산청군 내원리 출생. 1949년 지리산 소개령에 의해 가족 피신. 1950년 5월 소작인 남성과 결혼(17세). 결혼 1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은 빨치산이 됨. 남편의 행방을 묻는 군인들의 괴롭힘에 못 이겨 남편을 찾으러 입산한 후, 빨치산이 됨. 1952년 대토벌 당시 남편 사망. 잇따른 대토벌에 지리산 빨치산이 거의 절멸된 후, 1954년 ‘3인부대(정순덕·이응조·이홍이)’ 생활 시작. 1961년 이응조 사망. 1963년 11월 체포. 이홍이는 사살되고, 정순덕만 생존. 체포 당시 총상으로 인해 오른다리 절단. 1964년 무기징역 선고. 전향서 제출. 1985년 광복절 특사로 출감. 1985~1988년 ‘꽃동네마을’ 생활. 1989~1994년 이곳저곳 전전. 1995~1999년 비전향장기수들의 ‘만남의 집’에서 살림을 도움. 1999~2004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투병. 2004년 4월 사망.

한 인간의 생애가 거대 역사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해버린 이 경악스러운 형국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그녀에게 역사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비켜설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선 채로 온 몸을 관통해버린 유령 같은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녀 삶의 비극이 시작됐던 지리산 소개령은 바로 제주 4·3사건과 직결된 것이었다.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집결시킨 군대에서 좌익계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후, 그 일부가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지리산 소개령은 그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개령으로 마을이 불태워지던 날, 산골 소녀의 삶은 이미 비틀린 궤도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녀의 비극적 생애보다 나를 더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몸이었다. 인터뷰 당시 그녀의 몸에서 성한 곳은 오른팔뿐이었다. 체포될 때 총으로 난사당해 절단된 오른쪽 다리와 뇌졸중으로 완전히 마비된 왼쪽 신체. 인터뷰를 위해, 텅 비어 있는 오른쪽에 베개를 받힌 뒤 끈으로 온몸을 휠체어에 묶어 균형을 잡았다. 이틀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내, 그녀는 자꾸 흘러내리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잡아 끌어올리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기억하기조차 고통스러운, 신산했던 삶을 자꾸 기우뚱거리는 그 한 몸에 담은 채, 그녀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해방이 되면 학교에 보내주겠다던 아버지의 허망한 약속이었을까? 입 하나라도 덜 생각에 소작농에게 시집 보내버린 부모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자신의 청춘을 통째로 날려버린 분단된 조국에 대한 분노였을까? 출소 후, 자신을 철저히 외면한 가족들에 대한 서운함이었을까? 전향서를 썼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던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에 대한 섭섭함이었을까?1

아쉽게도 자신의 생애에 대한 그녀의 진술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건 위주의 진술, 절제된 감정, 13년 간 빨치산으로 훈련된 목소리. 그녀의 언어는 정확히 전사의 언어였다. 놀라울 만큼 선명한 기억으로 진술해 나가던 그녀의 언어는 지나치게 투명해서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을 감추고 있었다. 아니, 의도적으로 피해나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틀 동안 쏟아진 그녀의 투명한 언어보다 그녀의 텅 비고 마비된 몸이 훨씬 많은 말들을 담고 있었다. 언어를 초과해버린 몸. 무엇이 그녀의 삶을 비틀고, 언어조차 감당치 못할 텅 빈 몸을 갖게 했을까? 그 유령의 정체를 알기 위해 나는 다시 그녀와의 교감이 교차했던 첫 장면, ‘광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무장한 광주 여학생들의 거리 모습(아침), 이창성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모든 ‘몸’이 항쟁지도부였다

그러니까 이 아픔이라는 것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지금도 그 꿈을 꾸면 2시, 3시에 꿈을 꾸면 잠을 못자요. 그 악몽이라는 것은 엄청 힘들고 표현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장갑차가 도청까지 들어왔잖아요. 그런 꿈들을. 꿈에 깜짝 놀래 가지고. 꿈에서 어떻게 싸우다가 어쩌다가 꿈을 깨는 거죠. 그러면은 또 이제 잠을 못 자고. 이런 이야기들 표현하기가 엄청 힘들어. (5·18 당시 20대 상담사; 출처-2009년 필자 인터뷰)

그래도 30년이면 어느 정도 잊히지 않았을까? 한 세대를 넘어서는 시간이 지났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 판단은 곧 무색해졌다. 2009년 27명 여성들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은 공포와 경악, 분노와 안타까움, 회피와 침묵, 절망과 울부짖음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들에게 5·18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무엇이 이토록 이들을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울부짖게 만드는가.

40년 전 5월 광주는 고립무원이었다. 외곽 지역은 바리게이트로 차단됐고, 전화선은 끊어졌으며, 생필품 같은 물자조차 들여올 수 없었다. 5월 18일, 진압봉과 대검으로 시작된 계엄군의 진압은 19일부터 총, 헬기, 장갑차를 장착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을 희생시켰다. 도시는 아수라장이 됐고, 병원은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화려한 휴가’. 이 참혹한 인간 사냥에 계엄군이 붙인 작전명이었다.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군’은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결국 21일 오후 계엄군은 시내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21일부터 26일까지 그 유명한 ‘시민자치공동체’가 열렸다. 흔히 ‘해방기간’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 광주에서는 공권력 대신 시민 권력이, 무질서 대신 시민 자치가, 파괴와 약탈 대신 시민적 우애와 연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5월 27일 새벽, 컴컴한 하늘에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날, 광주시민 어느 누구도 잠들지 못한 채, 도청을 주시하며 그 고통스러운 마지막 유언을 듣고 있어야만 했다. 새벽 4시, 시민군과 계엄군 간의 1시간 교전 끝에 상황은 끝났다. 이날 도청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 통한의 열흘 동안, 여성들은 도처에 있었다. 도청과 YWCA를 거점으로, 여성들은 가두방송, 유인물 제작과 배포, 대자보 작성, 부상자 간호 및 수송, 대민업무, 모금과 취사, 시신처리, 장례 준비 등의 활동을 도맡아 진행해 나갔다. 거리에서는 나이 어린 여학생들이 폭증하는 부상자들 치료에 필요한 헌혈을 호소했고, 수많은 성매매 여성들은 기꺼이 헌혈에 동참하는 동시에 시신 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주부와 시장 상인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먹였다. 시위 대열의 3분의 1이 여성들일 만큼, 모든 계층을 망라한 여성들이 가두 투쟁에도 대대적으로 참여했다.

여성들이 전방위적으로 참여했던 만큼 피해도 참혹했다. 항쟁 기간 동안 여성들은 백주에 옷이 벗겨진 채 기합을 당하고, 가슴이 대검과 총탄에 잘려나갔으며, 후미진 골목 곳곳에서 성폭행에 유린당하고, 임신 8개월의 여성조차 총탄에 숨져야만 했다. 항쟁 직후, 구속된 여성들은 무차별적 구타와 고문을 밤낮 가리지 않고 당했으며, 일부 여성들에게는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든 성고문까지 자행됐다. 전시 상황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들이 법치국가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여성들의 몸은 그 폭력에 무방비로 점령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 여성들의 모든 ‘몸’이 그 자체로 ‘항쟁지도부’였다는 사실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거리로 나온 몸들. 헌혈하고 돌아오다 죽은 여고생의 몸, 청년을 숨겨준 대신 시뻘건 피멍을 기꺼이 감당했던 할머니의 등허리, 마지막 밤 새벽까지 울리던 가두방송의 목소리, 좌판 대신 솥을 내걸었던 여성 상인들의 손, 리본을 만들고, 대자보를 쓰고, 시위대를 위해 자갈돌을 깨고, 시신을 염하던 그 무수한 손들, 그리고 고문과 구타로 얼룩진 몸까지, 모든 몸들 하나하나가 항쟁지도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처음에 그 난리가 났을 때, 피가 모자라요. (중략) 우리 병원 현관에서부터 저기 밑에 있는 양림동까지 학생들이 줄을 서가지고 있었어요. 그 중에 ○○여고 학생 애가 있었는디, 금방 피를 빼고 보냈어요. 빼고 갔었는디, 한 시간도 안 돼 갖고, 그 애가 총 맞아서 죽어서 왔네요. 그래서 얼마나 우리가 걍(그냥) 애통할 것이에요. 금방 피가 식기도 전에 그 애가 와 가지고, 교복을 입고 그래서 ○○여고 학생이란 걸 알았어요. (1980년 당시 40대, 간호사; 출처-2009년 필자 인터뷰)

‘총’과 ‘밥’

크든 작든 하나의 사건이 폭풍처럼 지나면, 그 사건을 중심으로 한 온갖 서사들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1980년 5월 이후, 광주에서는 인정 투쟁 및 기억 투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무수한 서사가 쏟아졌다. 초기에 국가 폭력에 대한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했던 서사들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 역사로 인정되는 과정을 통해 영웅 서사들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웅 서사의 중심에는 ‘시민군’이 있었다. 정확히 말해, ‘총’을 든 ‘남성’ 시민군들이 있었다.

항쟁 직후, 광주는 무서운 침묵에 빠져 들었다. 항쟁 참여자들의 사망, 구속, 도피, 그리고 정부의 감시와 압력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기도 했다. 그러나 광주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모종의 ‘부끄러움’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광장에 나서지 못하고 목격자로만 남은 시민, 광장에 나왔으나 총을 들지 못했던 시민, 총을 들었으나 마지막 밤에 도청을 빠져나왔던 시민, 도청에 남아 끝까지 항쟁했으나 살아남았던 시민. 모두가 ‘산 자로서의 죄책감’에 휩싸였고, 그 죄책감이 만들어낸 부끄러움의 무게는 죽음의 형태에 가까울수록 한없이 무거워져 더욱더 입을 닫았다. 그래서 그 입들이 터져 말이 돼 나왔을 때, 죽음을 불사하고 계엄군에 저항했던 시민군 중심의 영웅 서사는, 광주시민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수긍됐다.

그러나 이렇듯 총을 든 남성들의 서사가 하나의 신화가 되어갈 동안, 여성들의 입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유족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증언들만 들려올 뿐, 여성들은 항쟁 동안 자신이 감당했던 일에 대해 침묵했다. 총을 들고 싸웠던 자에 비해, 그래서 죽거나 부상당해 불구가 된 자에 비해, 자신들이 했던 일들은 어느새 ‘하찮은 일’이 돼 있었다. ‘총을 들고 안 들고’의 잣대는, 당시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해냈던 모든 일들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어버렸다. 총은 그것을 들었던 시민과 들지 않았던 시민을 가르고, 여성과 남성을 갈라댔다.

남자들이 ‘하라, 마라’ 해서 한 것이 아니다. 여성들이 내용 만들어서 대자보 쓰고, 프랑카드 쓰고, 궐기대회 준비하고 그랬다. 여성들이 선전활동을 많이 했다. 총은 안 들었지. 총은 들 수가 없었지. 그 상황에서 남성들이 총은 주지도 않았다. ‘총을 들고 안 들고’의 차이였다. (1980년 당시 20대 연극인; 출처-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2000), 『여성·주체·삶』)

만약에 그때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이 총 들고 나가는 것이었다면, 총 들고 나갔을 것이다. 단지,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그것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한 것이다. (1980년 당시 10대 여고생; 출처-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2000), 『여성·주체·삶』)

이후 여성들의 다양한 투쟁 형태는 모두 ‘주먹밥’으로 수렴돼 버리고, 그 주먹밥조차 기념행사에 상징으로만 동원될 뿐, 정작 그 자리에 여성들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들의 항쟁이 ‘주먹밥’에 갇힌 순간, 어쩌면 여성들의 긴 침묵은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성들이 5·18을 기반으로 정치적,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조직화돼 가는 동안, 대다수 여성들은 개별화된 채 일상으로 몸을 숨겼다.

‘총과 밥’, 그것이 만들어낸 ‘총의 열린 말’과 ‘밥의 닫힌 말’, 영웅의 서사와 부재하는 서사. 목소리의 부재는 곧 역사의 부재를 의미한다. 항쟁 20년이 다 된 1999년,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한 여성들이 당면했던 것은 5월 항쟁에서 삭제돼 버린 자신들의 역사를 뼈아프게 응시하는 것이었다.

20년이 다 되지만 지금도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여성들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하나도 없어. 다 남자들이, 남자들이 다 해버렸지. (1980년 당시 20대 노동자; 출처-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2000), 『여성·주체·삶』)

광주항쟁 4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 오월항쟁의 공적 역사에서 사실상 ‘여성’은 없다. 단지 그동안 민간 차원에서 몇몇 여성 연구자들과 여성 단체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소수의 자료들만 외롭게 떠돌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산발적 자료들 중 하나가, 2009년 내가 참여했던 구술 생애사 인터뷰다. 나는 그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수많은 갈래치기로 닫혀버린 ‘밥의 언어’가 어쩌면, 한없이 ‘열린 언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거나 살아남거나, 총을 들었거나 안 들었거나,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그런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경계인지를 ‘밥의 언어’가 가르쳐주고 있었다.

캐테 콜비츠(Käthe Kollwitz), 〈어머니와 죽은 아들(Mutter mit totem Sohn)〉, 1937/38, 베를린 노이에 바헤(Neue Wache) 내 설치 전경. https://de.wikipedia.org/wiki/Neue_Wache

‘밥’의 시선, 모든 경계를 넘어선 생명의 언어

당시 인터뷰를 진행했던 27명의 여성들 중에는 항쟁 관련 당사자(피해보상자)와 일반 시민 여성들이 섞여 있었다. 일반 여성들 명단에는 주먹밥을 만들었던 상인들을 중심으로 주부, 여고생, 간호사,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이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내 관심을 끈 것은 항쟁 당사자들이 아니라 일반 여성들의 목소리였다. 항쟁 당사자들은 대부분 자신을 중심으로 한 사건 진행과 당시의 감정 상태(분노, 울분, 죄책감 등), 행위의 정당성과 의미 구축 등에 집중하는 반면, 일반 여성들에게는 죽은 자에 대한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대신 연민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의미 부여 대신 ‘내 일’이란 생각에 했다는 담담함이 훨씬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 일’이라고 생각했던 밑바닥에는, 다치고 죽어가는 시민군들이 모두 ‘내 자식, 내 동생’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데모 한 것만 알지 뭔 일 땜시 죽은지도 모르고, (…) 하도 싸우고 짠한 게로. 독자가리[돌]하고 막대기 하나 들고 싸운디, 저 사람들은 총을 갖고 싸운디 저놈[학생]들 다 죽겄다 싶은 게 (내가) 독자가리 들고 들쑤시고 그걸 했제. 환장하겄어. 짠해 죽겄고. 그냥 그 새끼들이 아파갖고. 안 무서워 하나도 안 무서워. 그 때는 죽는 것이 무섭지가 않더라고 새끼들이 죽은 게 얼마나 짠해. (5·18 당시 40대 주부; 출처-2009년 필자 인터뷰)

남편 잃고 자식 잃은 가슴은 얼마나 뜨겁고 아프겄소. 다 그것이 ‘내 일’이어요. 그 놈의[남의] 일이 아니여. (…) 글씨 다 내 동생이고 내 아들이고 딸이고 그 생각을 하고 항상 가는 거여. 짠한 게 (같이) 가는 거여. (5·18 당시 20대 상인; 출처-2009년 필자 인터뷰)

다라이에다 밥 해갖고 갖고 가믄 그 주먹밥을 그렇고 잘 먹응께. 이레를 딱 해줬지. 그때 참에는 이녘[내] 자식맹키로 짠해갖고. (5·18 당시 60대 상인; 출처-2009년 필자 인터뷰)

예리한 독자는 눈치 챘겠지만, 이 여성들의 진술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단어 하나가 있다. ‘짠하다’라는 전라도 방언이다. 모든 방언들이 그렇듯이, ‘불쌍하다’, ‘가엾다’와 같은 표준어로는 환치되지 않는, 수많은 맥락의 여백에서만 빛을 발하는 단어다. 그런데 마음이 아픈 상태를 가리키는 이 연민의 언어가 여성들의 진술에서 불쑥불쑥 무시로 튀어나왔다. 어떤 이유로 5월 항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저 총에 돌로 응전하는 아이들이 ‘내 자식들’ 같아서 ‘죽는 것도 무섭지 않아’ 돌자갈을 날라주었던 주부, 보따리 행상을 하면서도 데모를 하는 아이들이 안타까워 자신이 하루 번 돈을 털어 먹을 것을 사 댔던 상인, 역시나 장사를 하던 리어카에 주먹밥을 만들어 담아 시민군을 먹였던 할머니. 이들을 움직인 건, ‘내 자식들’을 향한 ‘짠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이 ‘짠한 마음’은 시민군에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골목골목 섰는디, 간이 벌렁벌렁 허드라고. 그래갖고 아침을 지어서 먹으면서, 밥이라도 좀 줄까? 그 놈들도 다 굶고 있는 것 같드라고. “밥이라도 조금 줄거나?” 긍께 “사식은 절대 안 된다”고 딱 잘라 불드라니까. (5·18 당시 30대 상인; 출처-2009년 필자 인터뷰)

점방에 가서 뭐 먹을 것 좀 사다가 학생들 모다 먹이고 거기서 집에를 왔제. (…) 우리집으로 간께, 우리집 문 앞에가 경찰들이 섰어. (…) 그래서 인자 이불을 문에다 쳐놓고 혼자 부엌에서 내 피옷 모두 절벅진 놈을 빨아서 걸어놓고는, 밥을 해서 밥솥단지 국솥단지 들고 가서 경찰들 저녁에 배고프다 싶어서 준께, 고놈을[밥을] “잘 묵었다”고. (5·18 당시 40대 주부; 출처-2009년 필자 인터뷰)

이 장면을 도대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계엄군들에게 밥을 권했던 상인은 항쟁 당시 사촌동생을 잃었으며, 경찰에게 밥을 먹였던 주부는 그날 도청에서 시민군들의 시신을 염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누구보다도 죽음에 가까웠던 그들이, 당시 ‘적’이라 치부되던 자들에게 밥을 권했다. 시뻘건 얼굴로 시민군을 쫓는 계엄군들조차 그들의 눈엔, 밥을 굶고 있는 애들에 불과했다. ‘적’과 ‘아’의 구분을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이 장면에서, 나는 ‘하찮은 주먹밥’에 갇혔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다시 웅웅거리며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밥’이 가진 온전한 힘이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그 힘을 ‘생명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여성들이 보여준 ‘밥의 시선’은 단순히 문화적으로 구성된 모성성 같은 언어로 사유될 것이 아니었다. 한 존재가 생명을 가진 다른 존재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주시하고, 다가서고, 먹이고, 보듬고, 살려내는 그런 시선이다. 이런 생명의 시선 앞에, 그동안 인간들이 만들어낸 모든 이분법적 경계들은 스스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적과 아의 구분을 넘어, 우리들 내부를 괴롭혔던 ‘총을 들고 안 들고’의 구분 같은 그런 경계들은 모두 ‘하찮아져 버린다’. 그리고 동시에 그 경계가 가진 폭력을 폭로한다. 두 아이를 품은 채 무덤으로 남은 제주 여성의 몸에 얹힌 좌우 이데올로기, 정순덕의 몸을 텅 비게 만든 중층적 경계들(젠더, 분단, 계급 등), 광주 여성들을 침묵케 했던 총의 문법들. 이것들이 생명성을 상실한 우리들이 만들어 낸 괴물이었음을 폭로한다.

세계사에서 유래가 드문 사례로 언급되는 7일 간의 ‘광주 공동체’는, 광주시민들에게 아직도 큰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그 공동체는 우리들이 꿈꾸었던 ‘대동세상’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모두가 ‘평등한 개인’들로 모여 ‘우애와 연대’로 만들어낸 자치 공동체였음을 말이다. 그때 우리가 열망했고 실체화시키고자 했던 세계가 바로 그 ‘생명의 시선’들로 가득한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언젠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꿈의 시간. 그 시간을 복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괴물이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 같다.

1정순덕은 체포된 후 옥중에서 ‘사상전향서’를 작성했음에도 22년간 복역을 해 ‘전향장기수’로 분류된다. 그녀는 비전향장기수들 10명이 생활하는 ‘만남의 집’에 들어가 살림을 도맡았다.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강도 높은 노동을 의족을 낀 불구의 몸으로 견뎌낸 것이다. 그럼에도 비전향장기수들은 그녀에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순덕은 자신이 사상전향서를 쓴 이력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인터뷰 내내 정순덕은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죄책감, 존경심, 서운함이 복합된 심리를 드러내었다. 정순덕은 그들에 대해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반드시 붙였으나, 그들은 그녀에게 하대했다고 한다. 그들에 대한 서운함이 강하게 감지됨에도 불구하고, 그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말문을 닫거나 의도적으로 화제를 바꾸기를 반복했다.

BIO

정경운은 현재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교수다. 전남대학교 문학 학사, 석사, 박사를 졸업했다. 대학에서는 신화학, 기호학, 문화예술교육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다양한 구술생애사 기록 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현재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여성 문제를 연구하는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수 년 전부터 신자유주의, 공동체, 공유재, 청소년 및 청년, 대안문화 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광주여성의 삶과 5·18, 『공동체의 경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