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G: 가소성의 신경학적 정의, 특히 창의적, 파괴적 속성의 스펙트럼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또한 인지적 네트워크와 감정, 이성과 정동의 격차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CM: 내가 공부한 배경인 대륙 철학에서는 뇌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나 해체 및 여러 차이의 철학(들)을 보여준 현대 철학에서나 인간 창의력의 연원은 특정한 능력이 아니라 일련의 공간이라고 보았다. 이때 공간이란 ‘영혼’, ‘마음’, ‘판단 능력’, ‘판단력’ 혹은 베르그송의 ‘기억’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뇌는 거의 논의된 바가 없다. 맨 처음으로 언급한 이가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는 뇌가 살아있는 존재의 삶의 원칙이라고 했으며, 이후 데카르트와 베르그송이 조금이나마 뇌에 관해 다루었다. 이때조차 뇌는 정보를 전송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 해석하는 능력은 없다고 간주됐다. 스스로 표상하고 사유하는 능력이 없으며, 감정도 전혀 없다고 보았다. 뇌에 적수가 있다면 바로 감정일 테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뇌를 최근 신경학 연구에 비추어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경과학에서 뇌는 모든 지적 과정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감정적 반응의 근원이기도 했다. 안토니오 다마시오(Antonio Damasio)가 ‘감정적 뇌’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한 것이 내게는 혁명적으로 다가왔다. 모든 정동이 뇌가 일으킨 현상이라니. 즐거움, 슬픔, 불안감 등 모든 정동이 신경 전달 물질, 도파민, 세로토닌의 혼합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았다. 이제는 화학적, 신경적 과정을 참조하지 않고 감정을 서술하거나 고려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 문제가 이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신경학은 물론 일상 속에서도 감정을 잃은 사람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의 저서 『새로운 부상자(The New Wounded)』에서 나의 할머니를 언급하며 다룬 적이 있다. 30년 전부터 감정은 중요한 이슈가 됐다. 신경 관련 질병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다마시오가 언급한 것처럼 감정이 없는 듯 차가워진 사람들을 발견하게 됐다. 감정이 상실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통 철학은 이러한 점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감정을 통해 세계에 대응한다고 했는데, 이때 감정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철학은 데카르트처럼 무신경함까지도 감정의 일환으로 분석했다. 감정이 사라지거나 파괴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파괴적 가소성, 뇌에 일종의 파괴적 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떠올리게 됐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신경학의 영역에 관심을 두게 됐다.
대부분 사람은 ‘컴퓨터는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뇌와 인공두뇌를 비교할 수 없다’고 여길테다. 감정이 바로 인간의 두뇌와 인공두뇌의 차이를 결정짓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를 비롯한 인공두뇌학자들의 기초적인 저술을 살펴보면, 이들은 우울에 빠져 기능을 잃기까지 하는 인공두뇌학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인공두뇌학의 목표는 단지 효율적인 기계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능을 잃은 것처럼 고장 나고 작동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위너는 기계를 만들 때 인간에게 나타나는 고장, 우울증까지도 적용하기 위해 최신의 심리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파괴적 가소성은 인공두뇌학적 능력일 수도 있다.
DA/NG: 세계자본주의, 특히 탈신체화(disembodied) 혹은 원격 근무 상황에서 작동하는 뇌의 구조를 어떻게 이해할까? “살아있는 뇌는 역사적 유물론적 노동 윤리의 대상이 된다”고 아바네시안(Avanessian)과 헤니히(Hennig)가 당신의 연구를 분석했듯이 당신은 뇌가 어떤 조건 하에 노동을 수행하는지 면밀히 탐구해왔다. 집단지능의 시대에 뇌의 노동에 관해 어떤 논의가 필요한가?
CM: 유기적 뇌와 인공두뇌를 구분하려고 할 때, 가장 특징적인 뇌의 노동은 컴퓨터를 거울처럼 다루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노동은 자본주의에 맞게 작동하도록 강요되는데, 스스로가 기계에 의해 미러링 되는 것에 대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인터뷰를 위해 화상으로 두 예술감독과 대화를 할 때, 나는 진정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기계와 대화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두 사람이나 기계를 통해 결국 나 자신과 이야기하는 것일까? 타자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구상해야 한다. 기계가 어느 선까지 타자인가? 몸 혹은 나머지 몸이 이 화상 회의나 화상 교육 등에 참여한다 해도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장기는 뇌일 것이다.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고조된 일이다. 이러한 온라인 교류에서는 본질적으로 뇌가 주로 노동하기 때문이다. 뇌가 모든 것을 할 동안 몸은 가만히 있다. 거의 50년간 뇌가 지적인 누적의 중심이었다고 보는 인지적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해 왔는데, 상황은 더 진전되고 있다. 이제 문제는 지적 누적뿐만 아니라 동일성과 타자성을 동시에 다루는 새로운 미러링 과정을 통해 온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됐다. 이제 우리는 재화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생산해 낸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뇌의 노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DA/NG: 이 세계는 뇌의 산물이고, 뇌는 분명 경탄할만한 세계를 만들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산물로, 우리가 끊임없이 진실과 사회적 역사의 의식에 도달하는 과정에 참여하도록 한다. 당신의 저서 중에서 다음의 인용구를 좋아한다. “뇌는 하나의 작품이지만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뇌의 주체, 즉 작가이면서 동시에 산물이지만 우리는 역시 이를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쓰지만, 자신이 만든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한 마르크스는 역사성의 의식을 깨우고자 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말은 우리의 맥락과 대상에 정확히 적용된다. ‘인간은 자신의 뇌를 만들지만 자신이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CM: 뇌와 세계는 적응과 창조의 상호적 과정을 통해 서로 미러링한다. 스스로를 벗어나는 움직임과 모든 수정 사항을 내적으로 흡수하는 움직임이 동반된다. 마르크스는 의식과 관련해서 설명하지만, 문제는 뇌가 의식 자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뇌의 의식은 불가능하다. 『뇌로 무엇을 해야 할까?(What Should We Do with Our Brain?)』를 집필하던 당시 이 사실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몇 장씩 글을 연달아 써 내려가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뇌를 의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뇌는 의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뇌 의식의 형태와 같은 것을 생산해 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른 종류의 변증법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인류세, 생태학적 위기, ‘인류가 생태 위기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 위기는 심각하고 가시적이며 명백한데도(바이러스가 그 예시다) “아니다, 괜찮다, 생태 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를 부정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는지’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정치인들이 이용했던 중대한 이 문제는 인식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건에 대한 인식을 생산해 내는 것이 어렵다는 데 있다. 인류는 자연을 변형할 수 있는 지질학적 힘이 됐다. 우리가 지질학적 힘이 됐는지 알 수 있는 의식은 어떻게 생산해 낼 수 있는가? 뇌가 무의식적인 구조라면 어떻게 뇌의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은 정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도 바로 이 질문을 던졌다. 마르크스가 의식을 언급할 때, 계급 투쟁이 당장 의식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의식적이었다면 이전부터 억압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문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의식의 부재를 보상할 수 있는 정치적 담론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