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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살아있는 뇌의 노동: 선조의 과거 및 상호 공조의 미래를 향해 가소성을 동원하기

By 카트린 말라부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의 저술은 유기체와 무기체, 영적인 존재로부터 발하는 것, 토착적 지식 세계, 주술적 우주론, 비인간의 인지, 기계 뇌라 불리는 것과 알고리즘 체제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 등 지능의 모든 영역을 살펴보는 예술적, 과학적 접근을 다루는 제13회 광주비엔날레를 꾸려 나가는 데 핵심적인 영감을 주었다.

데프네 아야스, 나타샤 진발라(Defne Ayas, Natasha Ginwala, 이하 ‘DA/NG’): 지난 20여 년 동안 헤겔, 프로이트, 인지과학과 신경과학 등을 참조하며 지능과 가소성(plasticity) 개념에 천착해왔다. 가소성을 동원해 ‘탄성적(elastic)’ 대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유기물이 환경과 관계 맺거나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현상을 다뤘다. 뇌 가소성 연구를 통해 뇌와 컴퓨터를 ‘생각하는 기계’로 비교했던 과거의 인식을 반박했던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 이하 ‘CM’): 우선, 나는 헤겔적 관점을 완전히 포기한 적이 없다. 가소성은 여전히 변증법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유기적 가소성과 기술적 가소성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 때문에 인공두뇌학(cybernetic)의 뇌 개념이 부정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구를 지속하자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지점에서 헤겔이 다시 유용해졌다. 헤겔에 의하면 ‘차이’란 차이로서 시작해 모순이 되고, 모순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 연구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자연적 가소성과 기술적 가소성 사이의 차이는 모순을 향해 이행했고, 모순으로서 사라졌다. 오늘날 자연적 가소성과 기술적 가소성 사이의 차이가 부재하기 때문에 지능을 개념화하기 어려워졌다. 가장 최근 인공두뇌학 연구는 다음 세대의 컴퓨터와 알고리즘이 시냅스를 통해 기능할 거라고 내다본다. 다시 말해, 뇌와 동일한 모델로서 그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사용하는 에너지를 조정하면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유기적인 것과 인공두뇌학적인 것 사이에 반듯한 선을 그리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제 변증법적 정체성으로 보이는 것을 다루는 것이 오늘날의 과제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관건은 이러한 차이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능과 인공두뇌의 지능, 인간 혹은 유기체의 뇌와 기계 뇌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전처럼 엄격한 이분법을 적용할 수는 없지만, 일련의 차이는 반드시 존재한다. 흔히 사람들은 정확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인간과 기계를 비교하는 순간 그 정체성을 부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 반응적 입장에 불과하다. 오늘날 주어진 과제는 다시금 유기체와 인공물 사이 대화의 적합한 방식을 정교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매우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수채 드로잉, 1869, 정신 착란 및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혼수상태로 이내 사망한 16세 여성의 뇌를 세포막까지 생생히 묘사한 그림이다. 뇌 전반 및 혈관에서는 어떤 구조적인 질병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진 출처: 웰컴 컬렉션(Wellcome Collection) https://wellcomecollection.org/works/m2dsdtef

DA/NG: 가소성의 신경학적 정의, 특히 창의적, 파괴적 속성의 스펙트럼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또한 인지적 네트워크와 감정, 이성과 정동의 격차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CM: 내가 공부한 배경인 대륙 철학에서는 뇌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나 해체 및 여러 차이의 철학(들)을 보여준 현대 철학에서나 인간 창의력의 연원은 특정한 능력이 아니라 일련의 공간이라고 보았다. 이때 공간이란 ‘영혼’, ‘마음’, ‘판단 능력’, ‘판단력’ 혹은 베르그송의 ‘기억’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뇌는 거의 논의된 바가 없다. 맨 처음으로 언급한 이가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는 뇌가 살아있는 존재의 삶의 원칙이라고 했으며, 이후 데카르트와 베르그송이 조금이나마 뇌에 관해 다루었다. 이때조차 뇌는 정보를 전송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 해석하는 능력은 없다고 간주됐다. 스스로 표상하고 사유하는 능력이 없으며, 감정도 전혀 없다고 보았다. 뇌에 적수가 있다면 바로 감정일 테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뇌를 최근 신경학 연구에 비추어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경과학에서 뇌는 모든 지적 과정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감정적 반응의 근원이기도 했다. 안토니오 다마시오(Antonio Damasio)가 ‘감정적 뇌’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한 것이 내게는 혁명적으로 다가왔다. 모든 정동이 뇌가 일으킨 현상이라니. 즐거움, 슬픔, 불안감 등 모든 정동이 신경 전달 물질, 도파민, 세로토닌의 혼합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았다. 이제는 화학적, 신경적 과정을 참조하지 않고 감정을 서술하거나 고려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 문제가 이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신경학은 물론 일상 속에서도 감정을 잃은 사람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의 저서 『새로운 부상자(The New Wounded)』에서 나의 할머니를 언급하며 다룬 적이 있다. 30년 전부터 감정은 중요한 이슈가 됐다. 신경 관련 질병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다마시오가 언급한 것처럼 감정이 없는 듯 차가워진 사람들을 발견하게 됐다. 감정이 상실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통 철학은 이러한 점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감정을 통해 세계에 대응한다고 했는데, 이때 감정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철학은 데카르트처럼 무신경함까지도 감정의 일환으로 분석했다. 감정이 사라지거나 파괴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파괴적 가소성, 뇌에 일종의 파괴적 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떠올리게 됐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신경학의 영역에 관심을 두게 됐다. 

대부분 사람은 ‘컴퓨터는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뇌와 인공두뇌를 비교할 수 없다’고 여길테다. 감정이 바로 인간의 두뇌와 인공두뇌의 차이를 결정짓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를 비롯한 인공두뇌학자들의 기초적인 저술을 살펴보면, 이들은 우울에 빠져 기능을 잃기까지 하는 인공두뇌학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인공두뇌학의 목표는 단지 효율적인 기계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능을 잃은 것처럼 고장 나고 작동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위너는 기계를 만들 때 인간에게 나타나는 고장, 우울증까지도 적용하기 위해 최신의 심리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파괴적 가소성은 인공두뇌학적 능력일 수도 있다. 

DA/NG: 세계자본주의, 특히 탈신체화(disembodied) 혹은 원격 근무 상황에서 작동하는 뇌의 구조를 어떻게 이해할까? 살아있는 뇌는 역사적 유물론적 노동 윤리의 대상이 된다 아바네시안(Avanessian)과 헤니히(Hennig)가 당신의 연구를 분석했듯이 당신은 뇌가 어떤 조건 하에 노동을 수행하는지 면밀히 탐구해왔다집단지능의 시대에 뇌의 노동에 관해 어떤 논의가 필요한가? 

CM: 유기적 뇌와 인공두뇌를 구분하려고 할 때, 가장 특징적인 뇌의 노동은 컴퓨터를 거울처럼 다루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노동은 자본주의에 맞게 작동하도록 강요되는데, 스스로가 기계에 의해 미러링 되는 것에 대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인터뷰를 위해 화상으로 두 예술감독과 대화를 할 때, 나는 진정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기계와 대화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두 사람이나 기계를 통해 결국 나 자신과 이야기하는 것일까? 타자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구상해야 한다. 기계가 어느 선까지 타자인가? 몸 혹은 나머지 몸이 이 화상 회의나 화상 교육 등에 참여한다 해도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장기는 뇌일 것이다.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고조된 일이다. 이러한 온라인 교류에서는 본질적으로 뇌가 주로 노동하기 때문이다. 뇌가 모든 것을 할 동안 몸은 가만히 있다. 거의 50년간 뇌가 지적인 누적의 중심이었다고 보는 인지적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해 왔는데, 상황은 더 진전되고 있다. 이제 문제는 지적 누적뿐만 아니라 동일성과 타자성을 동시에 다루는 새로운 미러링 과정을 통해 온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됐다. 이제 우리는 재화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생산해 낸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뇌의 노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DA/NG: 이 세계는 뇌의 산물이고, 뇌는 분명 경탄할만한 세계를 만들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산물로, 우리가 끊임없이 진실과 사회적 역사의 의식에 도달하는 과정에 참여하도록 한다. 당신의 저서 중에서 다음의 인용구를 좋아한다. “뇌는 하나의 작품이지만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뇌의 주체, 즉 작가이면서 동시에 산물이지만 우리는 역시 이를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쓰지만, 자신이 만든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한 마르크스는 역사성의 의식을 깨우고자 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말은 우리의 맥락과 대상에 정확히 적용된다. ‘인간은 자신의 뇌를 만들지만 자신이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CM: 뇌와 세계는 적응과 창조의 상호적 과정을 통해 서로 미러링한다. 스스로를 벗어나는 움직임과 모든 수정 사항을 내적으로 흡수하는 움직임이 동반된다. 마르크스는 의식과 관련해서 설명하지만, 문제는 뇌가 의식 자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뇌의 의식은 불가능하다. 『뇌로 무엇을 해야 할까?(What Should We Do with Our Brain?)』를 집필하던 당시 이 사실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몇 장씩 글을 연달아 써 내려가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뇌를 의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뇌는 의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뇌 의식의 형태와 같은 것을 생산해 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른 종류의 변증법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인류세, 생태학적 위기, ‘인류가 생태 위기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 위기는 심각하고 가시적이며 명백한데도(바이러스가 그 예시다) “아니다, 괜찮다, 생태 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를 부정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는지’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정치인들이 이용했던 중대한 이 문제는 인식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건에 대한 인식을 생산해 내는 것이 어렵다는 데 있다. 인류는 자연을 변형할 수 있는 지질학적 힘이 됐다. 우리가 지질학적 힘이 됐는지 알 수 있는 의식은 어떻게 생산해 낼 수 있는가? 뇌가 무의식적인 구조라면 어떻게 뇌의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은 정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도 바로 이 질문을 던졌다. 마르크스가 의식을 언급할 때, 계급 투쟁이 당장 의식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의식적이었다면 이전부터 억압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문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의식의 부재를 보상할 수 있는 정치적 담론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에 달려 있다.

시험관에서 이틀 반 성장한 쥐 피질 신경 세포에 있는 액틴필라멘트(actin filaments)를 제트-프로젝션(z-projection)으로 촬영한 이미지들을 결합한 모습. 사진 출처: 위키미디아 커먼스(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UM_110913_Cort_Neurons_2.5d_in_vitro_488_Phalloidin_no_perm_4_cmle-2.png

DA/NA: 신경과학뿐만 아니라 시와 문학으로부터도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안다. 이러한 접근법이 사유의 역사, 의식에 대한 이론이 겪어 온 인지적 혁명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CM: 어떤 면에서 이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 그것이 나의 특이성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히 답할 수 있는 것은 시는 오랫동안 과학과 별개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과학이 아니라 오로지 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했다. 과학은 인류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이후에는 들뢰즈, 데리다 등 문학에 특권을 부여하는 경향의 철학이 있었다. 이들은 문학을 과학적 지식에 반대되는 것으로 철학에 도입했다. 이러한 흐름에 익숙해져야 했다. 내 생각에 시, 문학, 더 일반적으로 창의력은 과학으로부터 단절될 수 없다. 이 둘을 단절한다면 최근 신경학적 연구, 생물학적 발견, 인공두뇌학 등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문학과 과학, 혹은 창의력과 과학의 딜레마를 끝내야 한다. 나는 예술과 과학의 경직된 경계를 끊어내고 처분하기 위해 이러한 접근을 취하는 것이다. 푸코는 생명권력을 언급하며 생물학이 반응적 과학이라고 말한다. 생물학은 규범성, 정치적 억압 등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연과학은 착취와 예속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자연과학은 해방적 힘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이를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힘을 예술을 통해 긍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DA/NA: 서구 모더니티에 기반한 연구를 초월한 과학까지 넘어선 그 다음 단계의 과학을 어떻게 전망하는가? 신경학은 물론 정치적 사안을 모두 고려하면서 말이다. 인문학에서의 비판이론과 심부 조직(deep-tissue) 작업을 분자, 세포, 신경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CM: 푸코가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유일한 철학적 목표는 나 자신의 변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푸코 선생, 당신은 어느 날 그 문제에 매달리다가 다음 날에는 다른 것에 집중할 것이다. 당신의 작업을 통합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푸코는 “내 작업의 목적은 나 자신의 변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변형(metamorphosis)과 종의 조형적 발달에 무척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이 말이 인상적이었다. 아마 철학을 한다는 것은 단지 나의 변화를 관찰하고, 사유가 전개되는 것을 보고, 이러한 발달의 저자이자 목격자가 되는 것일지 모른다. 헤겔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헤겔은 반대항을 마주할 때, 어딘가에서 모순을 본 듯 할 때, 변화에 의해서 위협을 느끼거나 공격당한 것 같을 때, 다른 방식으로 보라고 말한다. “그래, 위협, 장애물을 만났군.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마치 내가 처음 신경학을 발견하고 “안돼! 너무 싫어!”라고 반응하고 저항하면서 회한에 잠기거나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관찰하기 위해 더 유연하게 대처하려고 하거나. 내가 철학하는 방식은 나의 저항을 극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DN/NG: 무정부주의의 유산, 특히 표트르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의 사유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 “선조의 생물학적 과거에 대한 기억”에 대해 더 설명해 줄 수 있는가? 특히 후생유전학(epigenetics)의 확장된 영역, 새로운 형식을 구상하는 기술, 오늘날 지능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더 들어보고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한계는 무엇인가? 

CM: 고전적인 무정부주의가 폐기됐다면 그것은 그 사상이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물론 무정부주의가 사회적인 것의 생물학적 시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정부주의는 우리가 생물학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회생물학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 다시 크로포트킨 등의 저작을 읽어야 한다. 이들이 실제로 했던 말은 우리가 “사회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곤충이나 분자와 같이 삶의 근본적인 형태나 분자가 동물,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통해 무엇을 찾아볼 수 있는가? 다윈이 옳았다는 것, 즉 삶은 곧 투쟁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더불어 상리 공생(mutualism)과 협력의 경향 또한 볼 수 있다. 진화로 인해 인간이 등장했을 때 상호 원조의 형태는 변화해서 충분히 정치적이 됐다. 이로 인해 서로 다른 정치적 단체, 도시, 사회적 집단이 발생한 것이다. 상리 공생은 파편화되고 정치적으로 정교화됐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들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무정부주의가 가능한 것이다. 협력과 연대의 경향은 유전자에 직접 새겨져 있지 않아 유전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후생유전학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용어가 없었고, 단지 유전적이라고 주장한다고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이제 상호원조는 우리 종의 후생유전학적 기억, 즉 생물학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상호원조와 협력에 대한 경향성이 있지만, 이 경향성은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유전적인 경향성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변화에 열려 있는 것이다. 

현재 집필 중인 책은 철학과 무정부주의에 대한 것으로, 뇌와 컴퓨터의 작동 방식 사이에 있는 정체성에 관한 나의 사유를 담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둘 사이의 주요한 공통점은 절차의 수평적 속성이다. 『뇌로 무엇을 해야 할까?』를 저술할 당시부터 뇌의 에너지는 탈중심화돼 모든 것이 상호원조 모델에 의해 작동한다고 생각해 왔다. 모든 구역이 협력해서 신경학적 ‘포괄적 작업 영역’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현대 인공두뇌학은 수평적 협력과 탈중심적인 플랫폼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상호원조, 협조, 중심 권력의 부재와 같은 주제가 내게 울림을 준다. 그래서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상호원조 네트워크가 암호화폐로 프로젝트의 자금을 마련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뇌와 인공두뇌적 처리 과정의 수평적 작동에서 볼 수 있는 유사성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어줄 가능성과 기회로 보인다. 이 세계에서는 상호원조 모델에 따라 권력, 자금, 돈이 수평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갈등의 출발선에 와 있다. 현재 자본주의는 두 가지 형태 사이에서 씨름하고 있다. 하나는 중앙집권적인 권력으로, 중국이 국가 차원의 암호화폐를 개발하는 것처럼 모든 과정을 점유하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버(Uber)’나 ‘에어비앤비(Airbnb)’처럼 이러한 과정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조직의 무정부주의적 유형들 사이에서 내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러한 플랫폼을 통해 급진적인 사유가 축적돼 반대의 모델을 만들어 내고, 자본주의적 모델에 저항하는 수평적 작용 모델을 구축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 원주민 문화에서 암호화폐를 사용해 달러의 패권에 저항한 사례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암호화폐를 사용해서 허가증이 없는 여성에게 신분을 제공해 주는 일이 있었다. 이때 화폐는 해방적인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물론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드는 데 사용된 다른 사례도 있다.

티. 카지와라(T. Kajiwara),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의 초상 사진, 1911년경, 미국 의회 도서관,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mma_Goldman_seated.jpg

DA/NG: 더욱 민주적인 미래를 위해 당신이 상상했던 인간과 인공두뇌의 지능 사이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 논의가 지배와 권력, 은폐되고 잠재된, 비가시적인 독재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전개한 최근 저작과도 관련될 수 있는가? 이러한 폭군을 “여성 참여의 능동 지수”로 간주했던,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마음을 최근에 거론하기도 했다. 

CM: 권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 접근의 주된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중요한 것은 ‘지배’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 착취와 경제적 착취를 다룬다. 무정부주의는 지배를 다룬다.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적, 경제적 착취를 부정하지 않지만, 경제적 착취를 통치와 연결 짓고,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권력을 수용하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타인으로부터 지배당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지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무정부주의는 통치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엠마 골드만이 보여주듯 정부는 가정생활에서부터 시작된다. 큰 폭군이 있는가 하면 집에 있는 폭군이 있다. 남편, 아버지, 어머니, 심지어 자녀도 때로는 폭군이 될 수 있다. 사실 무정부주의는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것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지배에 대한 연구로서, 상호원조를 공부하면서 발생한 독립적인 운동이었다. 상호원조는 지배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이다.  

DA/NG: 이번 광주비엔날레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합법과 불법, 내부와 외부, 남성과 여성의 개념을 초월해 작업하는 작가를 주시해 왔다. 그 와중에 조형적 조건과 알고리즘적 자본주의와의 현재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트라우마 같은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비롯해 민중 운동과 연대로부터 우리는 선조의 지식과 지구의 생태계를 공언하는 토착적 우주론을 함께 탐구하고 있다. 외상 후의 주체성에 대한 당신의 작업은 신경적 조형이 사회정치적 영역은 물론 감정적인 연대의 네트워크로 확장될 수 있는가? 

CM: 인터뷰 전에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봤다. 이 운동이 한국 역사에 갖는 중요성을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제 강의를 하면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함께 읽었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트라우마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한 층위에서 이는 개인적인 ‘나’ 혹은 ‘너’의 역사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트라우마에 대한 것이다. 다른 층위에서, 트라우마는 곧 문화다. 당장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첫 트라우마는 우리를 둘러싸는 문화에 둘러싸이면서 발생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외상을 입으면, 문화적 배경이 두 번째 트라우마를 기억하며 등장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를 비판한다. “프로이트 당신에게 트라우마란 단지 작은 역사에 불과하다”며 비판한 레비스트로스는 “당신의 문화는 트라우마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의 문화는 안심시키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정체성, 언어, 보금자리만을 지칭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문화는 곧 적이다. 프랑스 것이든 한국 것이든 문화는 다 그러하다. 이처럼 트라우마의 두 가지 면모를 한 데 놓고 보면, 정치가 이러한 인간의 약점을 쥐고 속박시키면서 트라우마의 이중적 면모를 늘상 착취할 것이라는 점을 밝힐 수 있을 테다. 이처럼 각인된 트라우마의 이중적 특성을 유연하게 해체시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트라우마는 불가피하게 집단적 차원을 지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에는 이 지점에 대해 글을 써보려 한다.

BIO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는 런던 킹스턴 대학교 현대 유럽 철학 연구소와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지능을 모핑하기(Morphing Intelligence)』(2019), 『뇌로 무엇을 해야 할까?(What Should We Do with Our Brain?)』(2008), 『글쓰기의 황혼에서의 가소성(Plasticity at the Dusk of Writing )』(2009), 『내일 이전: 후생발생과 합리성(Before Tomorrow: Epigenesis and Rationality)』(201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