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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어느 미국 도시의 문화국 귀중: 증여, 갈취, 그리고 빤히 보이는 곳에 숨기

By 엘리자베스 A. 포비넬리

수신: 어느 미국 도시의 문화국
발신: 엘리자베스 A. 포비넬리(Elizabeth A. Povinelli)
답신: “증여, 갈취, 그리고 빤히 보이는 곳에 숨기”
날짜: 2020년 5월 31일

지난번 카라빙(Karrabing) 영화 상영 후, 객석에서 어떤 분이 비토착민 관객들이 우리가 보여준 영상을 (친절한 자막에도 불구하고)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 신경 쓰이는지 제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대표적 에세이 『증여론(The Gift)』(1930)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신 담당자 분의 질문에 답하고자 이렇게 글을 씁니다. 에세이 초반에 모스는 사회 복지의 총체는 거의 항상 “선물의 형태를 취하고, 이렇듯 후하게 주어지는 선물의 거래가 수반하는 제스처는 겸손한 허구, 형식주의, 사회적 기만으로 이루어지며 실제로는 의무와 경제적 사리 추구가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1 누군가에게 준 선물은 사실 청구물입니다. 즉, 내가 제공하는 걸 받고 화답하지 않으면 당신은 나의 적이 될 거라는 뜻이죠. 따라서 선물을 건네는 걸 순전히 관대한 행위로 여길 게 아니라 예의 바르게 받고 답례해야 사회적 질서를 보장합니다. 이를 보장하는 데 일종의 위협이 포함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날 영화 상영회에서 번역과 이해에 대한 관객의 질문을 받고 저는 왜 모스를 떠올렸을까요? 그 간단한 질문의 맥락 속에 어떠한 양상의 경제, 사회적 질서, 계속되는 해코지 등이 뒤섞여 부글거리고 있는 걸까요?

이 당시 담당자 분께서 객석에 계셨는지 확실치 않은 관계로, 우선 카라빙 필름 콜렉티브(KFC: Karraving Film Collective)에 관해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콜렉티브는 흔히 ‘강제 개입(The Intervention)’으로 알려진 2007년 ‘북방영토 국가비상대응(Northern Territory National Emergency Response)’이 일어나고 3년 후인 2010년 경에 출범했습니다. 이 ‘강제 개입’은 지방 원주민 공동체에서 아동을 방치하고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태가 만연하다는 보수주의 진영의 허구적 주장을 근거 삼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정부가 실행했던 일련의 정책을 말합니다. 급속도로 퍼진 국가적 성(性) 공황을 토대로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공동체를 국가가 통제하는 권한을 강화하는 광범위한 법안을 새롭게 제정했고, 이는 술 소비 제한, 아동 복지 점검의 의무화, 현저하게 증가된 경찰의 감시 및 괴롭힘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이 ‘강제 개입’은 지방 원주민 공동체에서 일어난 폭동의 여파와 맞물려 소규모 공동체 구성원 약 4분의 1이 일시적으로 집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극도로 위태로운 상황에서 타격을 입은 남녀노소의 주민들은 그들 지역 사회에 영향을 끼친 이슈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세상에 직접 알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그 노력에 동참했고, 1984년부터 이들과 함께 살고 일해 왔습니다. 상영회에서 관객의 질문에 제가 왜 모스를 떠올렸는지 자세히 설명하려면, 현재도 진행 중인 식민 전쟁의 일부인 이 경제적, 사회적 위협에 대한 지난 수십 년의 경험을 반드시 거론해야 하겠습니다.

카라빙 필름 콜렉티브, 〈인어들, 혹은 이상한 나라의 에이든(Mermaids, or Aiden in Wonderland)〉, 2018

확실히 해두자면, 비토착민 관객이 우리 영화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우리가 신경썼는지에 대한 질문에 모스가 어떤 답을 제시해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스는 몇몇 중요한 배경 이야기를 시사합니다. 그는 프랑스 폴리네시아 제도에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토착 원주민, 북미 원주민, 그리고 로마인과 독일인까지 되짚고 동시대 프랑스로 넘어가며 개척민 기록물과 역사적 문서에 의지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따라서 선물 증여에 대한 설명을 “이러한 텍스트 안에서” 찾기보다는 “텍스트 자체”가 증여, 취득, 미반납이 가진 힘을 “표명하고 있다”고 보도록 합시다. 이를테면,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의 ‘중앙 사막(Central Desert)’이라 불리는 아렌테(Arrernte) 땅에서 1896~97년 단어, 물품을 “교환”했던 사례를 둘러싸고 형성된 담론을 아시는지요?2 개척민들이 전면적으로 한창 무력 공격을 가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양상을 살펴보자면, 의도적으로 물웅덩이에 독을 풀었고, 소, 낙타, 양, 기계 장치 등이 자리 잡기에 적합하도록 토착민의 땅을 개간했고, 성범죄와 물리적 대학살을 저질렀습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생물학자 볼드윈 스펜서(Baldwin Spencer)와 전신기사 프랭크 길렌(Frank Gillen)은 아렌테 공동체, 이들의 이웃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개척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대가로 그들의 의례적 생활 환경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스펜서와 길렌은 이 과정이 불과 몇 주만에 끝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렌테 토착민들은 요령껏 이를 길게 연장했죠. 모든 선물이 암묵적인 선전포고를 내포한다는 모스의 주장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가 있을까요?3 우리의 아량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라. 개척민 식민주의의 지속적 폭력에 대해 몇 달 더 보호를 제공하는 대가로 스펜서와 길렌은 중앙 사막의 토착민들에게 그들의 의례적 지식에 대한 재현, 번역, 설명을 강요했습니다. 

이렇듯 목숨부지의 대가로 토착민들에게 땅을 넘어 지식까지 요구하는 행태는 스펜서와 길렌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민족지학적 열성가들이 음식이나 여타의 기본적인 보호를 제공하는 대가로 끝없는 요구를 이어 나갔어요. 스펜서와 길렌이 취득했던 물질적 재화와 자원이 알려지자, 아렌테 관련 지식이 지닌 가치가 더 높아졌고, 사회, 정신분석, 비판적 이론가들이 지닌 권력은 이미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스, 그리고 추후 그의 가장 유명한 해석가로 떠오른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는 이러한 형태의 교류가 인류의 역사를 반영한다고 보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저서 『친족의 기본 구조(Elementary Structure of Kinship)』(1969)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류는 언제나 교환의 법칙을 피할 수 있는 찰나를 포착해 잡아두기를 꿈꿔 왔다. 잃는 것 없이 얻을 수 있고, 나누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순간 말이다.”4 저는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 개척민 식민주의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소통과 이해를 활용해 ‘승리’를 쟁취하고자 한 사기꾼 게임이었죠. 우리가 당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달라. ‘우리를 위해’ 당신이 계속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면 모든 것을 내놓으라.

‘인정의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로 설명되는 후기 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단지 식민지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식민자는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도 충분치 않았고 새로 습득한 지식은 그것을 가르친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죠. “당신들에 관해 더 말해 주시오. 당신들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는지.” 그러면서 기존의 절도 행위는 뒷편으로 사라져 갑니다. 일종의 아카이브를 활용한 위협인 셈이죠. “이건 모두 우리가 당신의 조상들을 학살하기 전에 손에 넣은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훔치고 불태웠는지 알아내는 불가능한 과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만약 ‘이해’를 요구했던 개척민들이 처음부터 물리적 위협을 가했다면(우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으면 경찰들이 몰려올 것이다), 이는 곧 영적인 위협이기도 했습니다. 개척민 국가는 스펜서, 길런, 여타의 학자들이 만든 바로 그 아카이브를 활용하고 있고, 이는 현재 정서적인 도구로 활용됩니다. “우울한 상실(melancholic loss)” 담론의 일환으로 동원되는 것이죠.5 저는 담당자 분께서 오드라 심슨(Audra Simpson)의 저술도 읽어 보셨으면 해요. 그녀는 토착민을 상실의 영역에 몰아넣으려 하면 개척민 국가 역시 자신의 통치권이 구조적으로 시간적 제약을 받는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개척민 국가가 가진 차이점의 근본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의 통치권이 부분적일 뿐이라는 문제, 그리고 양측의 호혜적 관계를 위한 답례가 지연된 문제 등을 되짚어야 한다는 뜻합니다. 어느 부분을 되짚어 보든 간에, 개척민 국가가 상기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받아야 할 답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 혹은 이미 등을 돌린 자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 선물을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전쟁에 돌입할 준비가 됐다고 선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라빙 필름 콜렉티브, 〈시샘하는 이(The Jealous One)〉, 2017

이쯤에서 제가 그날 모스를 떠올렸던 이유가 단순히 모든 선물을 받고 답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개척민 식민주의의 오랜 폭력적 역사가 타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강요를 내포하고 있고, 그 강요는 더욱 깊이 있게 소통하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더욱 폭력적인 위협을 수반한다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르티니크(Martinique) 섬 출신의 위대한 시인이자 정치인, 이론가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가 했던 말을 인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서로 다른 문명이 서로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인정한다. 다양한 세계를 섞는다는 건 훌륭한 일이다. 제 아무리 특출날지라도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문명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문명에 관한 한 교류는 산소와 같다. 유럽은 매우 운 좋게도 교차로였고 나아가 모든 사상의 소재지이자 철학의 보고, 그리고 정서적 만남의 장이었기 때문에 에너지 재분배를 위한 최고의 중심지가 됐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식민지화는 과연 문명들이 서로 접할 수 있게 이끌었는가?6

이에 대한 세제르의 답은 명백한 ‘아니오’였습니다. 그는 “식민지화와 문명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식민지 개척, 법령, 보고서는 단 하나의 인간적 가치도 야기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7

물론 2020년 현재 북부 오스트레일리아는 1890년대 중앙 오스트레일리아와 다르다는 담당자 분의 지적을 이해합니다. 스펜서 및 길렌과 달리 동시대 민족학자들은 토착민의 삶을 맹렬하게 짓누르는 경찰을 저지할 힘이 없습니다. 개척민 법의 수호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카라빙’이 거주하는 농촌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들의 집과 마당에 들어가 음주자한테 벌금을 부과하고, 도로를 달리며 미등록 차량을 운행한 무면허 운전자를 잡아 가두고, 상당한 액수의 벌금을 미납한 사람들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합니다. 이때 전통 지식을 조금 교환해주면 할인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은 없습니다. 누가 무엇을 알던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직접 말한 바도 있죠. 

카라빙 필름 콜렉티브, 〈워타르, 바다 꿈(Wutharr, Saltwater Dreams)〉, 2016

개척민이 내미는 선물이 가진 딜레마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지속되지 않습니다. 스펜서와 길렌의 유산에서 싹 튼 수많은 관료주의적 파생물이 새로운 형태의 경찰 감시와 얽히면서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어쩌면 담당자 분이 사시는 곳에서는 제가 말하는 경찰 감시가 영 피부에 와닿지 않거나 매우 어렴풋하게 느껴지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농촌 토착민 공동체가 일상적으로 겪는 미행, 벌금 부과 같은 행위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운동가들이 말하는 “흑인으로 산다는 것(Living While Black)”과 필적할 만합니다.8 후기 자유주의 국가는 토착민이 특정 분야에 일가견이 있다고 증명할 수 있다면 그들이 토지 일부분을 (재)청구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줍니다.9 이는 전통 지식이 “우울한 상실”의 아카이브에 기여하는 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걸 시사하죠. 국가가 문지기 역할을 하지만 일단 이 첫 번째 관문을 지나면 국가와 자본 모두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살아있는 기억으로 보존하는 관행을 도외시합니다. 이 의도적인 묵살은 국가로 하여금 토착민 땅에 계속해서 가해지는 침범을 눈감아 주게 합니다. 공인된 집단에 속한 모든 토착민들은 동등하게 대우받는데, 이는 기업과 정부 기관이 지식을 머리가 아닌 차등적 관계에서 찾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차등적 관계는 글렌 쿨사드(Glend Coulthard)가 원주민에 대한 ‘인간 이상의 관계’라고 칭한 범주에 속합니다.10 한편, 기업과 행정관료들은 토지 권리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국가 기반의 권리란 일반적으로 토착민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확실성’을 지닌 기업 및 국가 주체에 부여됩니다. 이러한 국가는 원주민으로서의 토지 소유권이 소멸됐다고 판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 권리의 범위를 정하는 관습이 “우울한 상실”의 아카이브에 한 자리를 꿰어찰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1 혹은, 국가가 협정을 무효화하고 편의에 따라 원주민의 토지 소유 권리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12 국가의 승인하에 원주민의 토지 소유 권리 관련 절차를 진행하든, 이러한 제한적 주권 수여마저 철폐되도록 로비 활동을 하든, 기업들은 누가 이 땅을 알고 아끼는지, 그리고 누가 그에 가장 신세를 졌다고 느끼는지 묻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의 질문을 던질 뿐입니다. 당신은 나의 꼬임에 넘어가 이 땅의 일부를 내줄 만한 사람인가? 이미 당신 것이었지만 내가 당신에게 소유를 허락했던 것을 이제 나에게 돌려줄 것인가?

이쯤 되면 카라빙 영화의 서사적 이해에 대한 질문에 제가 그렇게 반응한 이유를 이해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국내외 관객에게 선보이는 카라빙 영화 속 증여와 수령의 역학은 무엇일까요? 단순한 관심에서 비롯했든, 매우 짜증이 났든, ‘해석’과 ‘이해’라는 선물이 온전히 주어지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과 관련해, 선물에 얽힌 식민 역사 아래에 흐르는 역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손가락을 활짝 펼친 손 위에 물을 부으면 대부분이 땅으로 흘러갈 거라는 걸 우리 모두 인지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하면, 확실하지도 않은 근소한 대가를 기대하며 모든 걸 내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과거는 물론 지금도 개척민 식민주의에 약탈당한 사람들이 최우선의 수혜자가 되게끔 하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어떻게 선물이 오가는 방향을 회복을 위한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요? “우울한 상실”의 아카이브에 내재된 식민주의적 기능을 어떻게 인정하고 직면할 수 있을까요? 탈식민지화 프로젝트와 관련된 이 질문들이 카라빙 영화의 해석 역학을 뒷받침합니다. 모든 것이 보이고 들리지만, 그 현실을 넘나드는 데 필수적 배경을 공유한 몇몇 사람만이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단순히 영화가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작하는 영화의 목적은 공유된 기억과 관심을 확장하고 강화함으로써 카라빙의 과거와 현재를 단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나 역사적 사건의 일부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자신의 기질로서 체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영화를 제작하다보면 뜻밖의 영역이 열립니다. 누군가는 몰랐던 선조 및 역사 이야기의 부분 부분을 알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를 찾는 과정에서 말이죠. 갑자기 줄거리, 인물, 설정이 바뀔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카라빙의 세계가 더 깊고 짙어집니다. 서로를 위해 연기하는 과정, 그리고 조상, 토템, 바람, 강, 바다, 동식물과 함께 연기하는 과정에서 비롯한 영향력이 영화 속으로 직접 스며들지는 않지만, 대신 토착민의 상실과 개척민의 이익이라는 식민지 담론을 계속해서 무력화시키려는 태세에 저항합니다. 

그러므로, 카라빙 영화는 개척민의 토지 박탈이 계속되는 사실을 직면한 채 선조와의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창의성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개척민 통치권이 끼쳐 온 악영향에 대응합니다. 수령인으로서 개척민을 입지를 결핍의 처지에 놓이게 하는 것이죠.

비토착민 관객이 카라빙 콜렉티브 영화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저희가 신경쓸까요? 담당자 분의 질문이 너무 순진해 빠졌다거나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피식민지인이 제작한 영화에 거는 비토착민 관객의 기대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서사 영화에 대한 기대를 더욱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 자리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대한 대가로 그간 익숙하게 손에 넣었던 모든 것들이 다시금 주어지리라는 수동적인 기대. 카라빙은 담당주 분이 지닌 지식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비토착민 관객을 향해 욕지기를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카라빙은 지식의 교류를 중심으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유효합니다.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는 명료합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가져간 것을 조건 없이 돌려줘야 합니다. 또한 이끌려 들지 말고 그들의 노력에 필히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식이라는 선물을 받고 싶다면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들로부터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좀 더 지식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마르셀 모스(Marcell Mauss), The Gift, trans. W.D. Halls (New York: W.W. Norton, 2000), 3.

2엘리자베스 A. 포비넬리(Elizabeth A. Povinelli), “The Vulva Thieves (Atna Nylkna)” in The Cunning of Recognition: Australian Multiculturalism and Indigenous Alterit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2), 71–110. 앨리슨 패치(Alison Petch), “Spencer and Gillen’s Work in Australia: The Interpretation of Power and Collecting in the Past,” Journal of Museum Ethnography (March 2003), 82–93.

3“증여와 초대에 반기를 든다는 건 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선포에 버금가는 행동이며 동맹과 공통성의 유대를 거절하는 행동이다.” 마르셀 모스, The Gift, 13.

4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 trans. James Harle Bell, John Richard von Sturmer and Rodney Needham (Boston: Beacon Press, 1969).

5“애도 안에서는 세상이, 그리고 우울증에서는 바로 자아가 빈곤하고 공허해 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Mourning and Melancholia” in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trans. James Strachey, Volume XIV (1914–1916) (London: The Hogarth Press, 2001), 243–58.

6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 Discourse on Colonialism, trans. Joan Pinkham (New York: Monthly Press, 2000), 33.

7에메 세제르, Discourse on Colonialism, 34.

8이 해시태그 운동 “#livingwhileblack”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운동과 연관돼 인종 편견 및 인종차별적 감시 활동에 이목을 끄는 데 사용된다.

9토지 청구권은 토지 회수 또는 한번도 양도된 적 없는 땅에만 해당된다.

10글렌 쿨사드(Glen Coulthard), Red Skin, White Masks: Rejecting the Colonial Politics of Recognition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4).

11“전통적인 법을 진정으로 공인하고 전통적인 관습을 준수하는 태도가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갔을 때, 원주민 토지 소유 권리의 토대 역시 사라졌다.” Mabo v Queensland (No 2) HCA 23 (1992) 175 CLR 1 (June 3, 1992), High Court.

12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 주 정부는 논란이 많은 아다니(Adani) 탄광에 배정된 토지에 대한 원주민의 토지 소유 권리를 소멸시켰다. 다음 자료 목록 참고. 벤 도허티(Ben Doherty), “Queensland extinguishes native title over Indigenous land to make way for Adani coalmine,” Guardian (August 31, 2019), https://www.theguardian.com/business/2019/aug/31/queensland-extinguishes-native-title-over-indigenous-land-to-make-way-for-adani-coalmine. / 다큐멘터리 영화 〈Undermined, Tales from the Kimberley〉, 감독 Nicholas D. Wrathall(2018) / 레이첼 오라일리(Rachel O’Reilly), 리서치 프로젝트 〈The Gas Imaginary〉(2011~현재).

BIO

엘리자베스 A. 포비넬리는 인류학자이자 영화감독이다. 현재 뉴욕 콜롬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의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 교수, 오스트레일리아 인류학 아카데미(Australian Academy of the Humanities)의 선임 연구원(Corresponding Fellow), 카라빙 필름 콜렉티브(Karrabing Film Collective)의 공동 설립자다. 포비넬리는 현재와 같지 않았다면 다른 형태의 인류학을 구현했을 후기 자유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저술 활동을 겸하고 있다. 이 이론은 북부 오스트레일리아의 토착민 공동체 동료들과 오래도록 지속해 온 관계를 통해 축적됐으며, 다섯 편의 저서, 수많은 단편 에세이, 카라빙 필름 콜렉티브의 영화 여섯 편 등에 고루 다뤄져 있다. 저서 『게온톨로지: 후기 자유주의에 바치는 진혼곡(Geontologies: A Requiem to Late Liberalism)』은 2017년 라이오넬 트릴링 출판 상(Lionel Trilling Book Award)을 수상했다. 카라빙의 영화 작품들은 2015년 비저블 상(Visible Award), 2015년 멜버른 국제영화제의 시네마 노바 상(Cinema Nova Award) 최고 단편 극영화(Best Short Fiction Film) 부문을 수상했으며, 베를린 국제영화제, 시드니 비엔날레, 멜버른 국제영화제, 테이트 모던, 도쿠멘타14, 콘투어 비엔날레, MoMA PS1 등 다수의 국제적 기관 및 행사에서 상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