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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죽은 연어로 만든 아버지의 초상: 추코트카와 러시아 극동의 성적 사회주의

By 야로슬라브 볼로보트 & 발렌틴 디아노코프

시베리아 최북동부의 자치구 추코트카(Chukotka, 혹은 ‘Chukchi(축치)’라고도 불림) 주민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동화 ‘쿠이키네쿠(Kuikineku)’에는 옛날 옛적에 살았던 동명의 사기꾼 쿠이키네쿠가 등장한다. 쿠이키네쿠는 바닷가를 거닐다가 통나무를 발견하고, 이를 깎아 어머니를 만들었다. 더 걸어가다 죽은 연어를 발견했다. 아버지를 만들기 딱 좋은 재료였다. 이름 없는 이야기꾼에 의하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들자마자 그의 남성기가 떨어져 나갔다. 쿠이키네쿠는 아름다운 여성이 됐다. 어머니는 떨어져 나간 것을 주어다 방울 두 개가 달린 반짇고리를 만들었다.” 얼마 후, 쿠이키네쿠는 여자로 사는 것이 질려버렸다. 그래서 바지를 입고, 음경과 고환이 있던 곳에 방울 달린 반짇고리를 붙였다.1 토착적인 버전의 반(反)오이디푸스인 쿠이키네쿠는 식민 지배 이전 추코트카인(혹은 축치인)의 성(性)에 관한 관행을 대변한다. 이 이야기는 1958년 발간된 얇은 책의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서문은 추코트카인과 근방의 부족들이 사회주의로 완전히 동화됐다고 상정하고 있다. 국경을 넘어 침입한 “착취자(미국인)”와 더 가까이 있는 “수탈자(샤먼)”가 드디어 추방당했고, 일종의 정착민 경제가 탄생하는 방향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서문의 논조는 앞서 언급한 이야기는 물론 다른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젠더간 전환을 수긍하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러는 편이 나았을테다. 쿠이키네쿠의 자연스러운 전환을 설명하려면 성전환이라는 변신(metamorphoses)을 동반하는 샤먼적 행위를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1940년 말부터는 토착 종교와 영성을 탄압했기 때문에 의례를 통해 샤먼이 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신내림의 기미가 있었던 이들은 정신병을 앓거나 자살하고 말았다.2

조야 게마우게(Zoya Gemauge), 〈물개 여인(Seal Woman)〉, 1987, 모스크바 국립동양미술관, © 모스크바 국립동양미술관. 수컷 물개가 사냥꾼의 아내인 축치인 여성을 납치한다. 납치된 여인은 물개가 되고, 물속에서 새로운 동반자와 삶을 꾸려간다. 축치인 사냥꾼은 아내를 찾아다닌다. 결국 사냥꾼이 이 수컷 물개를 죽이고 자신의 부인과 재회한다.

추코트카 및 러시아 극동 지역의 성적, 지리적 풍경은 1920년 소련이 손을 뻗치기 전에 더 두드러졌다. 시베리아가 정치적 망명지였기 때문에 혁명 이전 이 지역의 역사에 흥미로운 지점들이 적잖이 발견된다. 1890년대 말, 러시아 제국과 제국주의에 맞선 전 학자 및 학생은 반정부 인사와 문화적 엘리트와 함께 제정 러시아의 감옥 전초 기지로 이송됐다. 이들 중 탐구심이 많은 유대인은 정치적, 인종적으로 이중 부정을 당하는 처지였다. 이 때문에 유대인 사상가는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의 민족을 독립적인 정치적 행위자로 보았고, 이전에는 본격적인 민족지학적 혹은 사실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 지역 민족의 주체성을 본격적으로 다뤘다. 유대인과 극동 지역의 민족은 공통적으로 제국의 행정상 법적 외국인 혹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른 속(屬)”으로 분류돼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는 더 강화됐다. 하지만 시베리아 민족과 유대인이 법적 외국인 지위를 벗어버리고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과정을 거쳐야 했다. 전자는 정착해 도시 길드에 소속되면 그만이었지만, 후자는 이에 더해 동방정교회로 개종해야 했다. 사회주의 유대인 망명자는 정치적 연대보다 축치인, 코리야크인, 유카기르인, 에스키모인 및 시베리아 민족에 대한 탐구에 공을 들였다. 이러한 연구는 1960년대 이래, 그리고 현재의 탈식민주의를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연결지점을 제시하는데, 이는 반(反)자본주의 사유의 특정 지류들이 토착민의 자주 및 분쟁을 사례로 드는 부분에서 특히 유효하다. 또한, 동시대 미술과 학계는 서구 중심적인 반면 엘리트 노마디즘의 장으로 기능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전통적으로 방랑해 온 토착민이나 강제로 터전을 빼앗긴 이주민 공동체으로부터 자신보다는 덜 특권적인 형태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불현듯 인류학자가 된 이들 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블라디미르 보고라스와 소피아 보고라스(Vladimir and Sofia Bogoraz), 레브 슈텐베르크(Lev Shternberg), 블라디미르 요첼슨과 디나 요첼슨(Vladimir and Dina Iokhelson) 등이다. 이들은 망명자였을지라도 토착민에 깊이 매료됐는데, 토착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타자화(exoticization)에 가까웠다. 슈텐베르크는 사할린 섬의 니브흐인(Nivkh) 정착지에서 모계적 친족 관계를 발견했다. 이곳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3 요첼슨은 캄차카(Kamchatka) 섬에 사는 코리아크인(Koryak)과 더불어 지내면서 주술 의식에 참여했다. 그 경험을 통해 무아지경 상태에 대한 통찰력 있는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의식에서] 가시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의 경계가 흐려진다.”4 보고라스는 축치인(Chukchee)의 친족 구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한 첫 연구자로, 이들이 여성 파트너를 공유하면서 “아내로 맺은 동지(comrade-in-wife)”가 되는 현상을 서술했다. 축치인에게는 혈족보다 성적 관계를 통해 맺는 네트워크가 훨씬 더 강력하고 중요했던 것이다. 요첼슨이나 보고라스가 이러한 토착적 섹슈얼리티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논문을 발표한 적은 없었지만, 이들이 관찰한 바는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 관리자들이 초기에 보고했던 바와 더불어 알렉산더 막시모프(Alexander Maximov)의 고전적인 논문 「젠더 변신(Gender Metamorphosis)」(1912)에 요약돼 있다. 이 저술에서 토착민의 퀴어적(queer) 관례의 양상 전체를 찾아볼 수 있다. 축치인과 극동의 여러 민족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동성애, 젠더 퀴어, 크로스 드레싱에 관해 처음으로 기록한 보고서는 175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성애 관계를 관찰했던 이들은 공통적으로 얼만큼 사회에 수용되느냐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결코 낙인찍힌 행위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앞서 소개했던 쿠이케니쿠 전설의 더 오래된 버전을 살펴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요켈슨이 기록한 전설에 따르면, 코리아크인 남성 ‘빅 레이븐(Big Raven: 큰 까마귀)’은 자신의 성기를 가방(음낭), 반짇고리(고환), 골무(음경)로 변형했다고 전한다. 그(녀)가 코리아크인 형제들을 떠나 축치인 어부들 사이에서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더 포용적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해안에서 그(녀)는 돌망치로 만든 음경을 가진 ‘변신한 여성(transformed woman)’이 나타나 관심을 가져주기 전까지는 모든 구애자를 뿌리쳤다.5

〈콩고의 미술 작품들: 유명한 회화(Congo Art Works: Popular Painting)〉 전시 전경, 모스크바, 개러지 현대미술관(Garage Museum of Contemporary Art), 2017, 사진 제공: 이반 예로피브(Ivan Erofeev), © 개러지 현대미술관. 2017년 본 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 〈콩고의 미술 작품들: 유명한 회화〉는 지난 50여 년간 콩고의 미술을 망라하며, 벨기에 테뷰런(Tervuren)의 왕립 중앙아프리카 박물관(RMCA: Royal Museum for Central Africa)이 브뤼셀의 아트센터 보자르(BOZAR)와 협력해 기획됐으며, 담당 큐레이터는 밤비 세우펜스(Bambi Ceuppens)와 새미 발로지(Sammy Baloji)다. 이 전시가 다루는 식민주의 및 탈식민 조건 등에 대한 탐구를 러시아의 맥락에 맞게 살펴보기 위해 큐레이터 야로슬라브 볼로보트(Iaroslav Volovod)와 발렌틴 디아노코프(Valentin Diaconov)가 이 전시 안에 별도의 섹션을 추가했다. 이 섹션에는 러시아 10월 혁명 직후 소련에 편입된 러시아 극동의 지역인 추코트카의 미술이 소개됐다.

요켈슨, 보고라스, 그리고 여타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이야기와 관례를 범심론으로 설명한다. 즉, 이를 모든 개별 물질에 의식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으로 보고, 더 나아가 악령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해를 끼치지 않게끔 크로스 드레싱을 부추기는 정령들을 두려워했다고 본다. ‘켈렛(kelet)’이라는 정령은 젠더를 전환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주로 영적인 세계와 유망한 샤먼을 연결해 준다. 보고라스가 축치인을 관찰하면서 습득한 퀴어적 삶에 대한 정보는 이들이 샤머니즘에 대해 저술한 부분에 함께 기록돼 있긴 하지만, 퀴어적 행위를 종교적 정서와 의례의 일종으로 국한한 점은 이들이 ‘젠더 변신’을 기술하기 위해 들였던 노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보고라스는 동성 연인과 며칠 밤을 함께 보낸 뒤 퀴어 축치인을 다음과 같이 철저하게 기술했다.

틸루기(Tiluwgi)는 35살 정도로 젊고,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크고 거친 손에서 여성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틀간 그의 텐트에서 지내면서 신체적인 특성을 살뜰히 살펴볼 수 있었는데, 그는 완전히 남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더 구체적으로 관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명확히 밝혔다. 그의 남편인 얏기르긴(Yatgyrgyn)은 내가 약속한 삯을 받고 싶어서 틸루기를 설득했다. 하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얏기르긴의 ‘아내’ 틸루기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입을 다물게 했다. […] 얏기르긴은 틸루기가 여전히 신체적으로 남성이라는 점이 유감이긴 했으나 시간이 지나 정령 ‘켈렛’이 도와주신다면 그 옛날 존재하던 ‘부드러운 사람(soft human)’이 되기를 바랐다. 변신을 겪는다면 그의 성기 또한 달라질 것이다. 땋은 머리로 경계 진 틸루기의 얼굴은 […] 윗입술에 그림자가 드리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성의 얼굴에 비해 눈에 띄었다. […] 그의 습관과 기호는 완전히 여성적이었다. 그는 무척 수줍어 해서 내가 짓궂은 요청을 하면 두 뺨이 짙게 붉어졌다.6

보고라스는 “부드러운 사람”을 여럿 목격했지만, 여성으로 태어나 남성으로 살았던 (특히 샤머니즘적 의례를 하지 않았던) 트렌스젠더 남성의 경우, 그 존재에 대해 전해 듣긴 했지만 실제로 만나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샤먼적 능력은 성적 파워 플레이의 요소가 있는 행위에 부여됐는데, 즉 이 상황에서는 여성 정령이 대체로 우위를 점한다. 슈텐베르크는 치유 능력을 가르쳐주는 정령 ‘아야미(ayami)’에 관해 기록했다. ‘아야미’는 훗날 샤먼이 될 한 남성의 꿈에 찾아와 거의 협박하다시피 성적, 영적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아야미’는 그 남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네 손해지. 너를 죽이고 말 거야.”7 여기서 삶과 죽음을 통제하는 힘은 성적 유혹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 극동에서만 보이는 특징은 아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선지자의 탄식에서 유사한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유혹하시고, 내가 유혹당하였사옵니다.”8

축지인은 시스젠더의 경계를 넘어 존재하는 에로스의 영역을 넘나들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죽음까지 장악하려 했다. 축치인의 기대 수명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행정적 방침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비껴갔다. 보고라스는 질병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택하는 빈도에 대해 최초로 기록했다. 이후에 소련 당국이 축치인을 집단 농장에 정착시키려고 하자, 자살은 저항을 표하는 정치적 행위가 됐다.9 이와 같은 축치인의 죽음에 대한 놀라운 통제권은 더욱 광범위한 사회에서 자살이 용인되지 않는 시대가 돼서도 계속 이어졌다. 1987년 공동 저술된 논문에서 민요를 다룬 부분에 한 인류학자는 1940년대 후반 어떤 사냥꾼 수글리아진(Suglyagin)의 이야기를 전한다. 수글리아진은 눈보라를 뚫지 못하고 사방이 노출된 벌판에서 서서히 얼어갔다. 목숨이 스러져가던 순간, 그는 즉흥적으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설헤니(Sulheny, 사냥꾼의 토착 이름)는 걸을 수 없어, 걸을 수 없어. 다리도 없고, 팔도 없고. 그렇다면 날아가야지. 설헤니는 도착했다네. 모두가 다 기뻐해.” 노래의 마지막 부분처럼 수글리아진은 친구들에 의해 발견돼 집에 돌아왔다. 이 노래를 아내와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것이 그가 죽기 전 했던 마지막 행동이었다.10

〈콩고의 미술 작품들: 유명한 회화(Congo Art Works: Popular Painting)〉 전시 전경, 모스크바, 개러지 현대미술관(Garage Museum of Contemporary Art), 2017, 사진 제공: 이반 예로피브(Ivan Erofeev), © 개러지 현대미술관.

이는 프로이트 부르주아적 충동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욕구에 대해 자연스럽게 동조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망명한 러시아 인류학자들이 축치인을 관찰하던 시기 즈음에 프로이트는 유럽 남성의 성적 욕망을 오이디푸스 신화와 연결해 이론화하고 있었다. 물자가 부족하고, 이에 따라 소비문화가 조장하는 집착이 덜했던 극동의 민족들은 사물들을 단순히 가정 드라마에 등장하는 소품 정도로 활용할 가능성이 적었다. 물건 자체가 귀했기 때문에 각각이 활기와 행위자성을 지녔으며, 그 생기를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추코트카를 장악하기 이전에 물질적 불평등이 존재하기는 했다. 다른 사회주의자 연구자들과 더불어 보고라스는 사회의 구성에 주의를 기울였고, 축치인 공동체에서 더 빈곤한 사람이 부유한 일원의 심부름을 해서 지역 집권층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는 점을 기록했다. 또한, 생물이나 인격이 깃든 사물을 선물할 때도 현저한 격차가 있었고, 영적 세계와 접한 것은 무엇이든 지각이 있다고 여겨졌다. (보고라스는 악령의 배설물이 살아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예시로 들었다.) 대체로 동식물은 동일한 마음을 지닌 것으로 간주했고, 인간과 성적, 사회적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단, 사슴과 바다코끼리는 예외적으로 축치인의 도덕 세계에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이 점은 고래, 여우의 경우와 대조된다. 동식물의 인격은 지역 경제의 기반이 되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었다. 램프가 된 바다표범이 여전히 다른 동물이나 인간과 소통할 수 있었다는 동화에서 볼 수 있듯, 때때로 동물들은 객체화되는 동시에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보고라스는 자작나무가 중립적이며, 굳이 대우해줄 필요가 없다고 인식됐다는 점을 기록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문명화의 과제를 지닌 러시아 제국과 소련이 자연과의 투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 축치인에게는 일종의 존경심을 담은 무위였다는 점을 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성적, 생물정치학적 창의력에 대한 시각적 자료나 글은 얼마 살아남지 못했다. 거의 유일하게 널리 묘사된 비이성애적 관계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토착민 친족 관계였다. 당시 추코트카의 예술가들은 바다코끼리의 상아를 깎아 일상의 장면을 표현했는데, 최초의 조각은 러시아 및 미국 선원들과 교역을 하기 위해 만든 기념품의 형태로 등장했다. 이러한 작품에 그려진 복잡다단한 장면들은 축치인이 180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부상한 망가에 친숙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아마도 선원들이 가져온 망가 프린트를 추코트카에 전달해준 것으로 보이지만, 종이는 이 지역의 기후로 인해 신속하게 훼손되기 때문에 증거물이 남지 않았다. 1930년대 상아 조각은 미술 생산을 지배했던 소련의 예술가 조합에 포섭됐다. 하지만 몇몇 예술가들은 자결했거나 반러시아적 설화를 우화로 가장해 전달했던 동료들을 묘사함으로써 여전히 반제국주의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1840년대든 100년 후든, 식민지배는 놀라울 만큼 일관적이었고, 특히 통치의 다양한 양상을 연결짓는 중요한 개념들과 함께 맞물려 작동했다. 요한 코틀립 게오르기(Johann Gottlieb Georgi)의 『러시아 제국에 대한 물리적, 자연적 역사 기술(Geographisch-physikalische und naturhistorische Beschreibung des Russischen Reichs)』(1797~1802년 독일에서 발간)에 의하면, 러시아 제국의 다양한 민족들은 “근대 세계로 전환되는 각 과정 속에 있는 세계가 각종 필요에 따라 정제되고 강화되는 모습”을 대변한다.11 게오르기는 이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수렵과 채집의 단계다. 그 다음은 유목민적 양치기의 단계다. 마지막은 농경사회로, “초기 경작 단계에서 완성돼” 전파된다.12 1917년 10월 혁명이 역사가와 정책수립자들의 멈출 줄 모르는 진보주의에 제동을 걸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는데, 실제로 일정 기간 동안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정책 입안자들이 혁명 이전에 왕성했던 사회주의 인류학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극동의 민족 대부분이 계급 없는 사회, 즉 전체 인구가 단일한 착취 계층인 상태였다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보고라스의 축치인에 대한 서술이 몇 차례 미국에서 출간된 후 1943년 러시아에서 출간됐다. 보고라스는 과거의 진보주의적 관점을 시대에 발맞춰, 혁명적 관점에서 제국의 피해자를 연민하는 입장으로 수정해야 했다. 이후 그는 축치인이 “원시적 사회주의”의 일종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은 슈텐베르크가 20년도 더 전에 이미 제기했던 것이었다. 보고라스는 특히 “동지애” 개념을 축치인의 결정적인 삶의 방식으로 강조했다. “아내로 맺은 동지”가 되는 집단 결혼뿐만 아니라 개와 파이프 담배를 “지루함으로 맺은 동지”라고 부르는 관습을 그 예시로 들었다.13

1920년대 중반이 되자, 역사가이자 철학가인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가 제시한 비관적 세계 전망을 제대로 증명해내는 듯한 스탈린의 시베리아 및 극동 정책이 펼쳐졌다. 슈펭글러는 1922년 판본 『서양의 몰락(The Decline of the West)』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절반쯤 발전한 오늘날의 사회주의가 팽창을 저항하기 어려운 만큼, 사회주의는 어느 시점부터 강력한 팽창주의로 맹위를 떨칠 운명이다.”14 “맹위”는 스탈린 시대 부르주아 착취자가 가차없이 착취 대상을 물색했던 면모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단어다. 역사학자 유리 슬레즈킨(Yuri Slezkine)은 “‘계급 갈등이 심화’되는 시대에 계급의 주적을 찾아내지 못하면 스스로가 주적이 되고 만다”15는 점을 냉담하게 지적했다. 소련 권력의 기반은 유목민의 삶의 방식을 파괴하고 모든 극동의 민족을 집단 농장의 일원으로 포섭하는 데 있었다. 다른 한편, 주요 사회주의 망명자 중 하나인 세르게이 미츠키비치(Sergey Mitskevich)는 이 계획을 “터무니없는 관료주의적 책략으로 […] 전제 군주제 치하에서는 우스울 뿐”16이라고 평가했다. 1950년대부터 추코트카 근방을 기반으로 활동한 언론인이자 연구원 비탈리 차도린(Vitaly Zadorin)은 1960년대가 소련이 유목민을 정착민으로 전환해 지역의 사회적 지도를 다시 그리고자 공을 드렸던 마지막 시점이었다고 본다. 차도린은 소련의 전후 정책을 개괄하면서 “새로운 정착지가 유목 인구를 모아 특정한 사회 기반시설을 만들고,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부터 유목민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17고 기록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정착지에 거주했던 토착민 인구의 기대 수명은 42~44세에 불과해 목축민의 평균 수명에도 이르지 못하는 정도였다.18 1990년대는 극심한 빈곤과 분리주의 운동의 시대였다. 현재, 2000년대에 이 지역에 투입됐던 대규모 민간 투자로 인해 몇몇 토착적 관행(고래 사냥, 샤머니즘 의례 등)이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이성애적 관계는 현재 러시아의 “게이 프로파간다에 대한 법”에 의해 상당 부분 지워졌다. 소련 진보주의는 결국 이성애 중심적 핵가족을 사회의 발전에 의무적인 단계로 내세웠고, 퀴어적, 유동적 대안들은 대부분 역사 기록에 고립되고 말았다.

1Skazki Chuckotki [추코트카의 동화], ed. O.E. Baboshina (Moscow: Gospolitizdat, 1958), 96–97.

2Valentina Kharitonova, Shamany bez bubna” [북 없는 샤먼], Vostochnaya Kollektsia (Summer 2003), 130.

3Anna Sirina & Tatiana Roon, “Lev Iakovlevich Shternberg: At the Outset of Soviet Ethnography,”[레브 슈텐베르크: 소련 민족지학의 시초] in Jochelson, Bogoras and Shternberg: A Scientific Exploration of Northeastern Siberia and the Shaping of Soviet Ethnography [요켈슨, 보고라스, 슈텐베르크: 북동 시베리아 탐구 및 소련 민족지학의 형성], ed. Erich Kasten (Fürstenberg/Havel: Kulturstiftung Sibirien, 2018), 213.

4The Jesup North Pacific Expedition. Memoir of the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제섭의 북태평양원정대. 미국 자연사 박물관 회고록], Vol. IX: The Yukaghir and the Yukaghirized Tungus, ed. Franz Boas (New York: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1908); cited in Patricia Rieff Anawalt, Shamanic Regalia in the Far North [극동의 주술적 예복](New York: Thames & Hudson, 2014), 40.

5Alexander Maximov, Etnograficheskie trudy [민족지학적 연구](Yekaterinburg: Yurait, 2019), 169.

6V.G. Bogoraz, The Chukchee [축치인], Vol. II(Leningrad: Izdatel’stvo Glavsevmorputy, 1939), 97.

7Lev Shternberg, Evolutsia religioznyh verovanii (The Evolution of religious belief [종교적 신념의 진화]), (Yekaterinburg: Yurait, 2018), 168. English translation: Will Roscoe, Jesus and the Shamanic Tradition of Same-Sex Love [예수와 주술적 동성애 전통](San Francisco: Suspect Thought Press, 2004), 136.

8예레미아 20장 7-18절, 신약성경, 개정판. *번역자 주.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You seduced me, Lord, and I let myself be seduced.” 성경 한국어본은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본문에는 문맥상 ‘유혹하다(seduce)’의 의미를 살려 다르게 번역됐다.

9Yuri Slezkine, Arctic Mirrors: Russia and the Small Peoples of the North [북극의 거울: 러시아와 북쪽의 작은 민족들]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235.

10Istoria i kultura chuckchei. Istoriko-etnographicheskie ocherki [축치족의 역사와 문화. 역사적, 민족지학적 에세이들], ed. A.I. Krushanov (Leningrad: Nauka, 1987), 237.

11Johann Gottlieb Georgi, Opisanie vseh obitayuschikh v Rossiiskom gosudarstve narodov (St. Petersburg: 1799), vii–x; cited in Slezkine, Arctic Mirrors [북극의 거울], 56.

12위의 책.

13Bogoraz, The Chukchee [축치족], Vol I, xvi.

14Oswald Spengler, The Decline of the West. Form and Actuality [서양의 몰락. 형태와 현실] (New York: A.A. Knopf, 1926), 37.

15Slezkine, Arctic Mirrors [북극의 거울], 192.

16위의 책, 191.

17V.I. Zadorin,Iz istorii pohoda chuckchei v kommunism i obratno” [축치족의 사회주의 진입 및 후퇴에 대한 짧은 역사] in Tropoyu Bogoraza (The Path of Bogoras [보고라스의 길]), (Moscow: Nasledie/GEOS, 2008), 127–29. 저자가 의미한 “예상”은 도회지 사교계의 인사들의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위의 글.

BIO

야로슬라브 볼로보트(1991년 무르만스크 출생)는 모스크바의 개러지 현대미술관(Garage Museum of Contemporary Art) 큐레이터이자 모스크바 젊은 미술 국제 비엔날레(the Moscow International Biennale for Young Art)의 전문 이사회 일원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동양학을 전공했으며, 본 대학과 뉴욕의 바드 컬리지(Bard College)의 공동 프로그램을 통해 큐레이터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러지 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 및 프로젝트를 위해 협력한 작가로는 타렉 아투이(Tarek Atoui), 요코 오노(Yoko Ono), 잔나 카디로바(Zhanna Kadyrova), 마리 루이스 에크만(Marie Louise Ekman), 라시드 아라인(Rasheed Araeen), 시셀 톨라스(Sissel Tolaas), 토마스 사라세노(Tomás Saraceno) 등이 있다.

발렌틴 디아노코프(1980년 모스크바 출생)는 비평가이자 모스크바의 개러지 현대미술관 큐레이터다. 문화학 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으며, 현재 고등경제대학(Higher School of Economics)에서 미술 전문 글쓰기에 관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그가 기획한 프로젝트로는 〈Detective〉(2014, 모스크바 현대미술관), 〈Laughter in the Gallery〉(2015, 나 샤볼로프케 갤러리(Na Shabolovke Gallery)), 〈The Fabric of Felicity〉(2018, 개러지 현대미술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