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프로이트 부르주아적 충동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욕구에 대해 자연스럽게 동조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망명한 러시아 인류학자들이 축치인을 관찰하던 시기 즈음에 프로이트는 유럽 남성의 성적 욕망을 오이디푸스 신화와 연결해 이론화하고 있었다. 물자가 부족하고, 이에 따라 소비문화가 조장하는 집착이 덜했던 극동의 민족들은 사물들을 단순히 가정 드라마에 등장하는 소품 정도로 활용할 가능성이 적었다. 물건 자체가 귀했기 때문에 각각이 활기와 행위자성을 지녔으며, 그 생기를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추코트카를 장악하기 이전에 물질적 불평등이 존재하기는 했다. 다른 사회주의자 연구자들과 더불어 보고라스는 사회의 구성에 주의를 기울였고, 축치인 공동체에서 더 빈곤한 사람이 부유한 일원의 심부름을 해서 지역 집권층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는 점을 기록했다. 또한, 생물이나 인격이 깃든 사물을 선물할 때도 현저한 격차가 있었고, 영적 세계와 접한 것은 무엇이든 지각이 있다고 여겨졌다. (보고라스는 악령의 배설물이 살아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예시로 들었다.) 대체로 동식물은 동일한 마음을 지닌 것으로 간주했고, 인간과 성적, 사회적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단, 사슴과 바다코끼리는 예외적으로 축치인의 도덕 세계에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이 점은 고래, 여우의 경우와 대조된다. 동식물의 인격은 지역 경제의 기반이 되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었다. 램프가 된 바다표범이 여전히 다른 동물이나 인간과 소통할 수 있었다는 동화에서 볼 수 있듯, 때때로 동물들은 객체화되는 동시에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보고라스는 자작나무가 중립적이며, 굳이 대우해줄 필요가 없다고 인식됐다는 점을 기록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문명화의 과제를 지닌 러시아 제국과 소련이 자연과의 투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 축치인에게는 일종의 존경심을 담은 무위였다는 점을 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성적, 생물정치학적 창의력에 대한 시각적 자료나 글은 얼마 살아남지 못했다. 거의 유일하게 널리 묘사된 비이성애적 관계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토착민 친족 관계였다. 당시 추코트카의 예술가들은 바다코끼리의 상아를 깎아 일상의 장면을 표현했는데, 최초의 조각은 러시아 및 미국 선원들과 교역을 하기 위해 만든 기념품의 형태로 등장했다. 이러한 작품에 그려진 복잡다단한 장면들은 축치인이 180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부상한 망가에 친숙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아마도 선원들이 가져온 망가 프린트를 추코트카에 전달해준 것으로 보이지만, 종이는 이 지역의 기후로 인해 신속하게 훼손되기 때문에 증거물이 남지 않았다. 1930년대 상아 조각은 미술 생산을 지배했던 소련의 예술가 조합에 포섭됐다. 하지만 몇몇 예술가들은 자결했거나 반러시아적 설화를 우화로 가장해 전달했던 동료들을 묘사함으로써 여전히 반제국주의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1840년대든 100년 후든, 식민지배는 놀라울 만큼 일관적이었고, 특히 통치의 다양한 양상을 연결짓는 중요한 개념들과 함께 맞물려 작동했다. 요한 코틀립 게오르기(Johann Gottlieb Georgi)의 『러시아 제국에 대한 물리적, 자연적 역사 기술(Geographisch-physikalische und naturhistorische Beschreibung des Russischen Reichs)』(1797~1802년 독일에서 발간)에 의하면, 러시아 제국의 다양한 민족들은 “근대 세계로 전환되는 각 과정 속에 있는 세계가 각종 필요에 따라 정제되고 강화되는 모습”을 대변한다.11 게오르기는 이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수렵과 채집의 단계다. 그 다음은 유목민적 양치기의 단계다. 마지막은 농경사회로, “초기 경작 단계에서 완성돼” 전파된다.12 1917년 10월 혁명이 역사가와 정책수립자들의 멈출 줄 모르는 진보주의에 제동을 걸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는데, 실제로 일정 기간 동안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정책 입안자들이 혁명 이전에 왕성했던 사회주의 인류학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극동의 민족 대부분이 계급 없는 사회, 즉 전체 인구가 단일한 착취 계층인 상태였다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보고라스의 축치인에 대한 서술이 몇 차례 미국에서 출간된 후 1943년 러시아에서 출간됐다. 보고라스는 과거의 진보주의적 관점을 시대에 발맞춰, 혁명적 관점에서 제국의 피해자를 연민하는 입장으로 수정해야 했다. 이후 그는 축치인이 “원시적 사회주의”의 일종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은 슈텐베르크가 20년도 더 전에 이미 제기했던 것이었다. 보고라스는 특히 “동지애” 개념을 축치인의 결정적인 삶의 방식으로 강조했다. “아내로 맺은 동지”가 되는 집단 결혼뿐만 아니라 개와 파이프 담배를 “지루함으로 맺은 동지”라고 부르는 관습을 그 예시로 들었다.13
1920년대 중반이 되자, 역사가이자 철학가인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가 제시한 비관적 세계 전망을 제대로 증명해내는 듯한 스탈린의 시베리아 및 극동 정책이 펼쳐졌다. 슈펭글러는 1922년 판본 『서양의 몰락(The Decline of the West)』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절반쯤 발전한 오늘날의 사회주의가 팽창을 저항하기 어려운 만큼, 사회주의는 어느 시점부터 강력한 팽창주의로 맹위를 떨칠 운명이다.”14 “맹위”는 스탈린 시대 부르주아 착취자가 가차없이 착취 대상을 물색했던 면모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단어다. 역사학자 유리 슬레즈킨(Yuri Slezkine)은 “‘계급 갈등이 심화’되는 시대에 계급의 주적을 찾아내지 못하면 스스로가 주적이 되고 만다”15는 점을 냉담하게 지적했다. 소련 권력의 기반은 유목민의 삶의 방식을 파괴하고 모든 극동의 민족을 집단 농장의 일원으로 포섭하는 데 있었다. 다른 한편, 주요 사회주의 망명자 중 하나인 세르게이 미츠키비치(Sergey Mitskevich)는 이 계획을 “터무니없는 관료주의적 책략으로 […] 전제 군주제 치하에서는 우스울 뿐”16이라고 평가했다. 1950년대부터 추코트카 근방을 기반으로 활동한 언론인이자 연구원 비탈리 차도린(Vitaly Zadorin)은 1960년대가 소련이 유목민을 정착민으로 전환해 지역의 사회적 지도를 다시 그리고자 공을 드렸던 마지막 시점이었다고 본다. 차도린은 소련의 전후 정책을 개괄하면서 “새로운 정착지가 유목 인구를 모아 특정한 사회 기반시설을 만들고,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부터 유목민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17고 기록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정착지에 거주했던 토착민 인구의 기대 수명은 42~44세에 불과해 목축민의 평균 수명에도 이르지 못하는 정도였다.18 1990년대는 극심한 빈곤과 분리주의 운동의 시대였다. 현재, 2000년대에 이 지역에 투입됐던 대규모 민간 투자로 인해 몇몇 토착적 관행(고래 사냥, 샤머니즘 의례 등)이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이성애적 관계는 현재 러시아의 “게이 프로파간다에 대한 법”에 의해 상당 부분 지워졌다. 소련 진보주의는 결국 이성애 중심적 핵가족을 사회의 발전에 의무적인 단계로 내세웠고, 퀴어적, 유동적 대안들은 대부분 역사 기록에 고립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