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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기술적 특이점 vs. 도교적 로봇

By 육 후이

코스모테크닉스(cosmotechnics), 동양과 서양

네이선 가델스(Nathan Gardels, 이하 ‘NG’): 저작에서 토대를 이루는 우주론에 의해 서로 다른 문명이 탄생하고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코스모테크닉스’란 무엇인가?

육후이(Yuk Hui, 이하 ‘YH’): 기술적 산물이 기후변화, 인공지능, 합성생물학 등으로 역사적 경계에 도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코스모테크닉스, 즉 기술이 어떻게 세계관에 녹아드는지 반드시 재고해야 한다. 중국 근대화의 주역은 지난 150년간 기술에 대한 서구적 의미를 열의를 다해 받아들였다. 이때 기술은 여타 모든 것을 인간이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상정된다. 하지만 서구의 근대성과 세계적 근대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비유럽권 사유와 필연적인 존재 방식(corollary ways of being)이 기술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 과제를 위해 현재 기술적 발전을 고려해 동서양의 사상사를 새로 해석해야 한다. 나는 전통 중국 사유에서 중요한 두 가지 범주 간의 역동적인 관계를 통해 중국 코스모테크닉스에 접근하고자 했다. 하나는 ‘도(道)’, 즉 (흔히 ‘길’이라고 하며) 모든 존재를 순환하는 천상의 생명력이고, 다른 하나는 도구나 연장을 뜻하는 ‘기(器)’다. 도와 기, 다시 말해 영혼과 기계는 불가분의 연합을 이룬다.

중국 역사를 가로질러 도와 기의 연합은 시대별로 적합한 도덕과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 식으로 수용됐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연장을 사용하는 도구적 사고에 의해 기술 발전을 전개한 서구에 비해 중국은 바로 이 연합이 기술 발전을 촉진하거나 제한했다.

중국과 현대 서구 의학의 차이가 이 지점을 잘 보여준다. 현대 서구 의학은 몸에 기계적으로 과학을 적용함으로써 치료한다. 중국 전통 의학은 몸에 조화를 조성함으로써 낫게 한다. 중국 전통 의학은 상보적인 이항인 음과 양, ‘기(氣)’라고 불리는 치유의 에너지가 흐를 수 있는 오행(나무, 불, 흙, 쇠, 물) 등 중국 전통 우주론과 동일한 어휘를 사용한다.

NG: ‘도덕(morality)’이라는 말을 들으면 삶에 대한 공정하고 옳은 규범을 암시한다. 도와 기의 연합으로 인한 도덕의 구체적인 예시를 들 수 있는가?

YH: 고대 중국에서 도덕이란 행위를 지배하는 규율을 따라야 하는 의무를 뜻하지 않았다. 고대인에게 도덕이란 덕(德)이 도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천상과 지상의 선함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드러나듯, 하늘과 땅, 즉 ‘천(天)’과 ‘곤(坤)’이 훌륭한 인격의 조건이자 모형이다. 『주역』의 첫머리를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다. “천상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깨우친 자는 항시 분투한다. 지상은 돕고 자연스러우나, 고결한 자만이 극도를 견딜 수 있다.”

유학자에게 현자가 된다는 것은 천명을 아는 것이었다. 천상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자는 도덕적인 함의를 해석해 그 명을 알 수 있다. 도교 신자는 이러한 창의적인 이율배반을 긍정한다. 이들에게 ‘도(道)’와 ‘덕(德)’은 마치 오염되지 않은 채 열려 있는 신생아와 같은 천진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道)’는 무(無)도 존재도 아니며, 양극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원칙이다. 이는 대립 항 사이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재귀적(recursive) 움직임으로, 이때 대립 항은 우주론적으로는 ‘무(無)’와 ‘유(有)’ 사이의 연속성, 형이상학1에서는 ‘체(體)’와 ‘용(用)’, 삶의 철학에서는 ‘천(天)’과 ‘인(人)’, 사회정치적 삶에서는 ‘도’와 ‘기’ 사이의 코스모테크닉스를 말한다.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고대그리스인도 이러한 존재의 대립 항을 발견했다. 하지만 수 세기 이후에도 영향을 끼치는 근본적인 차이는 그리스인은 이러한 힘을 연속과 조화가 아닌 불연속과 모순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되기(Becoming)’의 관계적 유동

NG: 그렇다면 도교와 유학은 일본의 신도와 더불어 인간을 서로,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연합돼 있다고 보고, 인간과 우주 혹은 자연 질서를 관계적으로 해석했다고 보면 되는가?

YH: 그렇다.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중국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한편 서구의 사유는 그리스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존재를 실체(substance)로 보았다. 서구 철학에서는 본질적인 것과 우발적인 것 사이의 긴장이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범주(category)’라고 규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존재가 상대적이라면(즉, 우발적이라면) 다른 존재에 의존적일 것이며, 그것의 본질이나 실체를 규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양립 불가성으로부터 동양 사상은 절대적인 것 혹은 본질적인 것을 지향하기보다 관계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라마톨로지(Of Grammatology)』에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서구의 표음문자와 중국의 상형문자를 비교하면서 전자가 실체와 관련이 있다면 후자는 관계적이라고 보았다. 영국의 생화학자이자 중국학자인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은 중국과 기술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관계적 감각(감응, 感應)을 ‘공명(resonance)’으로 번역했다. 주체와 우주 사이의 공명은 도덕률의 기반이 된다. 공명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자연에 반(反)해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이란 외부의 환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 즉 자연적 이치를 말한다. 도와 기가 더해진 것이지 그 중 하나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프랑스 사상가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중국 사상에서 존재론 혹은 존재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존재의 문제는 서구와 달리 우선시 되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히 해두자면, 이러한 규모의 일반화에는 예외가 따른다. 단, 중국 철학은 가령 플라톤의 이데아(eidos), 즉 존재가 그 방식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영구적인 리얼리티, 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더욱 경험적으로 서술한 형상(morphe, form)과 같은 존재 혹은 영원한 형태를 찾지 않는다는 것만은 말해 둘 수 있다. ‘되기’의 관계적인 유동에 대한 것이지 어떤 본질적인 존재의 규정된 형상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다.

서구에서는 절대적인 것을 일종의 목적성(finality) 혹은 궁극의 리얼리티로 본다. 이에 따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적 과정, 즉 유사-신성에 해당하는 헤겔의 ‘절대정신(absolute spirit)’을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이에 해당되는 절대성을 중국의 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도교에서는 가장 큰 것, 가장 작은 것, 절대적인 것, 종점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데, 이를 초월하는 무언가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도 혹은 길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거나 작은 것을 항시적으로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상은 언제나 천상과 지상의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서구 사상에 비해 덜 목적론적이다.2 목적은 그렇게 느껴지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목적 혹은 종결점이란 상시 재생되는 우주의 본질(noumena)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사유나 감각을 통해 규정되는 현상적인 세계에 있지 않다.

 

계몽 시대의 종말

NG: 하이데거는 서구 형이상학의 종말으로서 사이버네틱스3를 언급한다. 시스템 내 피드백 루프를 통해 유기체와 기계, 객체와 주체가 통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최근에 인공지능(AI)이 도래하면서 인간중심적인 철학의 “계몽의 종말”의 전조를 보여줬다고 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기계도 경험을 통해 학습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우발적인 사건을 포함해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키신저에 의하면 계몽 철학이 서구의 기술적 지배를 배태한 대신 AI가 새로운 철학에 대한 추구를 촉진했다. 이러한 결론에 동의하는가?

YH: 하이데거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를 비롯한 사이버네틱 사상가의 저서를 읽었기 때문에 재생적인 피드백 루프를 통해 유기체적 정신(mind)과 기계의 통합이 갖는 막대한 영향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 겉으로는 서양 사상가인 그가 중국의 코스모테크닉스에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종말을 고했을 때,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 기독교와 헤겔로 이어진 서구 사상의 종결을 의미했던 것이다. 1966년 『슈피겔(Der Spiegel)』에서 진행한 유명한 인터뷰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Only a God Can Save Us)」에서 철학 이후에는 무엇이 오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사이버네틱스”라고 대답했다. 중국어로 “end”는 “성취”, “달성”, “완수”로 번역된다. 그러니 하이데거에게 사이버네틱스라는 현대 기술은 서구 형이상학의 달성인 것이다.

사이버네틱스, 이후에는 AI를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난 기술적 기량은 피드백 루프와 학습 알고리즘을 통해 성취한 것으로, 유기체와 같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유기체와 기계를 지양을 통해 서로 하나가 되도록 함으로써 형이상학에서 비롯했지만 이를 극복한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은 기계 장치(mechanism)를 ‘생의 충동(élan vital)’, 혹은 생의 약동(vital impetus)이라는 개념과 대치시켰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는 이러한 대립이 허구적인 것이라고 천명했는데, 사이버네틱 기계는 바로 이러한 반대 항을 극복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현대철학이 유기적, 생기론적인 개념에 기대어 인간의 사유 능력을 기계에 대치시켰다면, 사이버네틱스는 이러한 이분법을 넘어선 것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초기 자동화 기계가 아닌 사이버네틱스가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하이데거에게 사이버네틱스란 존재를 이해하기에 더 발전되고, 유기적이거나 유기체적인 형태로, 자연에 대한 모더니티의 기술적, 기계론적 승리에 해당한다. 이로써 현대 기술은 형이상학의 역사를 달성한 것이다.

사이버네틱스와 AI 학습 루프의 재귀적 속성은 사실 형이상학의 초월을 뜻한다. 재귀적 속성은 마르크스가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본 자동 기계가 수행하는 기계적인 반복과는 다르다. 자신을 결정짓기 위해 자신으로 돌아오는 루프 운동으로, 움직임은 우발성에 열려 있으며 이로써 독특성을 갖게 된다. 재귀적 속성은 우리가 영혼이라고 이해하는 것과도 조응한다. 영혼은 자신을 알고 결정짓기 위해 자신으로 돌아오는 능력이 있다. 새로운 만남을 통해 자신을 떠날 때, 영혼은 기억이라고 부르는 흔적 가운데 자신을 현실화한다. 새로운 정보, 즉 우발성은 이러한 개별화 과정을 촉발한다.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 말했듯, 정보는 “차이를 만드는 차이”다. 이 때문에 그가 “정신의 생태학”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모든 존재의 독특성은 바로 이러한 재귀적 속성과 우발적 속성의 역동으로부터 구성된다.

NG: 우발성에 대해 언급했으니, 세계적으로 퍼진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일상 속 습관부터 미생물에 대한 관점까지, 완전히 다른 재귀적 루프를 자리 잡게 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을 다른 방향으로 몰고 갔다.

YH: 정말 그렇다. 하지만 키신저의 논의로 돌아가자면, 그의 입장은 지정학적 관점 외에도 기술과 사유의 역사의 차원에서 검토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는 백과전서파의 진보에 대한 낙천주의로부터 힘을 얻은 기계 장치의 시대로, 기계적 도구의 무한한 개선 가능성을 전제로 보증됐다.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전서파가 말하는 기계의 시대나 마르크스가 이후에 말한 열역학 기계의 시대는 지나가고 새로운 기계의 시대가 왔다. 이 시대는 사이버네틱스와 AI의 “유기체 되기”와 더불어 기계 장치가 선형적 인과관계를 전제한다. 모든 시작의 끝은 새로운 시작의 시작인 것이다.

NG: 서구 형이상학이 스스로를 초월했듯, 점차 도교적이 되는 것 같다. 하이데거가 찾던 새로운 시작은 초기 유럽 철학의 전통에서부터 사유를 전개했던 그가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았던 동양에서 이미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과 더불어 하이데거가 펼친 내면의 진리에 대한 사유는 1930년대에 시작해 1960년대까지도 공명했다. 『슈피겔』 인터뷰에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다. “본질적이고 광대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고향이 있고, 전통에 기반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다.” 나아가 존재 물음(being-as-such)과 존재자 전체(being-in-totality)의 내적 진리는 독일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가 본 바와 같이 고향(heimat)과 민족정신(volksgeist)의 맥락으로부터 구성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점이 당신의 도교적 우주론과 이로부터 비롯한 다양한 코스모테크닉스와 맞물리는 것 같다.

YH: 그렇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코스모테크닉스라고 부르는 것과 하이데거의 연구를 연결하고 싶었다. 특히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technē) 개념을 존재, 즉 그리스인들이 ‘알레테이아(aletheia)’라고 불렀던 진리의 탈은폐로 재정의하고자 했다. 장소가 가진 땅의 미덕(earthy virtue)에 기반한 사유가 바로 코스모테크닉스의 동력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러한 지역성에 대한 담론은 변화나 진보, 귀향이나 전통주의로의 복귀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을 지역의 관점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재전유하는 것이다.

새로운 축의 시대

NG: 이 모든 이야기는 독일, 스위스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중국의 유교, 인도의 우파니샤드와 불교, 호머의 그리스, 히브리 선지자 등 모든 종교와 윤리적 시스템이 동시에 불협화음을 이루며 서로 연결되지 않은 세계 속에 발생한 2000년 전을 뜻하는 ‘축의 시대’가 새로 도래했다는 것을 뜻하는가? 역사상 수렴(convergence)의 성취는 새로운 분기(divergence)를 낳는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모더니티의 승리 이후 새로운 시작을 찾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서구와 그 사상이 펼치는 전 지구적 탐색은 한계에 도달했고 분열하고 있다. 변증법은 전환을 마주한다. 현대판 바벨탑은 무너지려는 폼세를 잡았다. 우리가 현재 ‘철학하는 새로운 조건’에 이르렀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

YH: 보편화와 수렴의 결과로 우리는 ‘새로운 축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목전에 와 있다. 이제 문제는 “무엇이 일어날까”가 아니라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가”다. 이제 철학하기는 가능한 것에 앞서 불가능한 것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를 위해, 근대화 과정에서 망각돼 보편적인 모노테크놀로지(mono-technology)로 동화된 중국 코스모테크닉스와 서구의 근본적인 차이로 돌아가야 한다. 서구에서 중국 코스모테크닉스를 다룰 때, 특정한 역사적 시점의 특정한 기술의 발전상을 대조하는 것에 머물곤 한다. 나는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과 피터 틸(Peter Thiel)의 트랜스휴머니즘이 대표하는 통합된 글로벌 시스템의 완전한 실현에 반대한다. 철저히 서구적 특이점4을 향해 목적론적으로 수렴되는 것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안적 가능성, 분기(bifurcations), 분절(fragmentation)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시작에는 분절화를 통해 복수의 시작점이 있어야 한다.

NG: 특이점의 보편화를 성취하기 위한 가속화된 경쟁에 대한 저항을 새로운 시작의 유일한 가능성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중국 코스모테크닉스는 과연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우선은 ‘크리스퍼(CRISPR: 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 아기와 감시국가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YH: 내가 코스모테크닉스를 윤리적, 우주적 질서의 통합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자연의 정복을 의미하는 기술적 활동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은 그보다 큰 현실 속에 머문다.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기술에 의해 잠식돼 특정한 삶의 형태와 사유의 방식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중국이 현재 모노테크놀로지 문화에 기여하는 사회 신용 시스템을 구축할 알고리즘을 개발할 수 있는지 혹은 더 나은 5G 기술을 갖추게 될지 그 이상의 문제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어떻게 코스모테크닉스가 서구에서 과학적 ‘진보’라고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중국의 사유에 기반하는가의 문제다.

누군가 내가 언급했던 도교 로봇과 유기체적 AI가 무척 이국적으로 들린다며 풍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러한 풍자를 오늘날 기술적 과속을 막아 설 수 있는 비유럽 사유를 받아들이고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기술 개념을 재고하고 재정의함으로써 새로운 방향성을 얻을 수 있을까? 단지 더 발전된 기술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인식론들과 인식들을 발견하고 창안함으로써 기후 변화뿐만 아니라 인류세의 위기 전반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NG: 요약해서 덧붙일 말이 있는지?

YH: 계몽 시대로 되돌아가 결론을 맺어보려 한다. 계몽 시대가 보여주듯, 철학은 혁명의 기반이 된다. 철학, 사회, 윤리, 교육, 종교, 국제 정치와 법의 기본 원칙을 바꿔 놓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의 철학은 새로운 세계사의 가능성을 향해야 한다. 계몽 시대 철학과는 다른 방향의 목표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미리 간주한 절대적인 것에 의해 세계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해 세계를 파편화하는 것이 그 목표가 될 수 있겠다. 새로운 세계사는 모더니티의 붕괴로부터 등장한다.

*이 인터뷰는 베르그루엔 인스티튜트(Berggruen Institute)가 발행하는 『노에마 매거진(Noēma Magazine)』의 웹사이트에 2020년 6월 19일 공개된 글을 재게재한 것이다. 육 후이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본지의 편집장 네이선 가델스(Nathan Gardels)와 함께 서로 다른 기술철학(들)에 대한 사유의 새로운 경로를 탐색했다.

1형이상학은 철학의 한 분과로, 존재, 앎, 공간, 시간과 같은 넓고 추상적인 개념을 다룬다.

2목적론은 목적, 목표, 종점에 의거한 사태에 대한 설명이다.

3사이버네틱스는 신경계, 뇌, 기계-전자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등 자동화된 통제 시스템에 대한 탐구다.

4‘(기술적) 특이점(the technological singularity 혹은 the singularity)’이란 인공지능 기계와 (혹은 그것이나) 인지적으로 향상된 생물학적 지능이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지점을 말한다.

BIO

육 후이(Yuk Hui)는 기술에 관해 사유하는 철학자로, 현재 독일 바이마르 소재의 바우하우스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홍콩 대학교,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링과 철학을 수학했다.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로이파나 대학교 뤼네부르크(Leuphana University Lüneburg)의 철학 및 예술 인스티튜트(IPK)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디지털 오브제의 존재에 관해(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6), 『중국에서의 기술에 대한 질문. 코스모테크닉스에 관한 에세이(The Question Concerning Technology in China. An Essay in Cosmotechnics)』(Urbanomic, 2016), 『재귀성과 우연성(Recursivity and Contingency)』(Roman and Littlefield International, 201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