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th Gwangju Biennale — Minds Rising Spirits Tuning

Sign up for minds rising journal

essay

지저귀는 기계 속의 유령들: 예술, 소셜미디어, 팬데믹

By 아크바 압바스

독특한 연애편지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이 편지는 동시대 삶에서 미디어가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기 전부터 미디어의 문제점을 짚어 낸 조숙한 관찰이라 할 수 있다. 1922년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밀레나 예센스카(Milena Jesenská)에게 “글로 쓴 입맞춤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썼다. 미디어 피드에 떠도는 유령들이 여정 도중 그 입맞춤을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유령들과 맞서기 위해 인간은 기차, 자동차, 카프카의 시대에 등장한 비행기와 같은 교통수단을 발명해 사람들을 더 가까이 불러왔다. 하지만 이 유령들은 우편, 전신, 전화, 인터넷, 무선 연결, 영상 통화, 메시지 플랫폼 등 비밀스럽게 더 많은 방편으로 맞섰다. 카프카는 “이 유령들은 굶을 일이 없을 테지만, 우리는 소멸할 테다”라고 썼다.1 엉뚱한 연애편지로 시작했던 것은 배고픈 유령들이 미디어의 가상 공간을 배회하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로 바뀌고 만다. 선견지명이 보이는 이 편지에서 이 배고픈 유령들과 그 동시대적 아바타들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더 어울린다. 발전하는 기술에 의해 창조되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예견된 유령들(proleptic ghosts)’이기 때문이다. 

파울 클레(Paul Klee), 〈지저귀는 기계(Die Zwitscher-Maschine)〉, 1922. Oil transfer drawing, watercolor, and ink on paper with gouache and ink borders on board, 64.1 x 48.3 cm. © 2021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VG Bild-Kunst, Bonn.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편지를 썼던 해에 파울 클레(Paul Klee)는 〈지저귀는 기계(Die Zwitscher-Maschine)〉를 그렸다. 처음에는 작품이 하찮거나 ‘귀여워’ 보이다가 세부 묘사가 서서히 눈에 띌수록 이 그림이 얼마나 ‘예리하고’ 언캐니한지 알 수 있다. 수채 배경에 유채를 옮기는 기법으로 제작된 이 작품에는 지저귀는 새 네 마리가 표현적으로 묘사돼 있고, 자국이 남아 “자연스럽고”과 즉흥적인 첫인상을 준다. 하지만 카프카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묘사는 갈수록 사악해진다. 새들은 선에 어색하게 앉아 부리에서 기이한 사물들을 뱉어내고, 선의 끝자락에는 수동 크랭크가 달려있다. 크랭크를 돌리면 새는 위아래로 움직이고 지저귀며 기계적으로 생산된 자연을 표현한다. 이 자연은 실제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위협적이다. 새와 선 아래 있는 분홍색과 흰색의 직사각형을 지저귀는 기계가 추락시킬 제물이 빠질 구덩이로 볼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위협을 암시한다. 회고하건대, 클레의 작은 새들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새(The Birds)〉(1963)에 등장하는 새들과 닮았는데, 이 영화에서 감독은 기계적으로 제작한 사운드로 실제 새 소리를 대체해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클레의 작품에서는 자연과 기계, 혹은 귀여움과 공포가 대조적인 요소가 아니라 중첩된다는 점에서 그의 새와 히치콕의 새는 구별된다. 그 결과, 이 작품은 한 차원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기보다 복수의 차원에 개입한다. 클레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 부분을 구성해 이룬 전체를 구상”하려는 노력에 대해 피력한 1924년 강의 “모던 아트에 관해”에서 차원이라는 문제에 특히 골몰했다. 클레의 접근은 특수하지만, 다차원성은 큐비즘에서도 중요한 요소다. 클레의 회화 다수에서 감상자는 끊임없이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움직이고, 한 차원에서 일치하지 않는 것이 다른 차원에서는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의적 고백(Creative Confession)』(1920)에서 클레가 남긴 유명한 말처럼, “예술은 시각적인 것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이게 만든다.” 즉, 실재의 다양한 차원을 드러낸다.

이제는 지저귀는(twitter/tweet) 새를 생각할 때, 모던 아트의 역사보다 소셜미디어를 떠올릴 가능성이 크다. 2006년 출시된 트위터(Twitter)는 전혀 다른 지저귀는 기계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 서서히 진화해 이제는 클레의 작품을 우연히 패러디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서비스의 이름은 클레의 작품과 무관했다. 트위터의 설립자는 ‘하찮은 정보의 단타성 파열’이라는 ‘트위터(twitter)’의 사전적 정의를 참고해서 미디어 플랫폼의 미래적인 형태를 제시하고자 했다. 새처럼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트윗도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트위터의 로고는 하늘색 새다. 트위터의 기발한 점은 메시지가 하찮을수록 언론의 자유, 민주주의, 반엘리트주의, 개인의 해방이라는 가치를 더 강력하게 의미한다는 것이다. “해방”은 사실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함한다. 생태학자는 나뭇가지에서 새가 지저귀는 것은 호흡이나 오줌과 같은 배출물로 영역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개가 땅에 오줌을 누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트위터 세대는 이러한 사실을 굳이 믿지 않아도 된다. 전문가들은 지루한 사실만 나열해 우리를 제한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하찮은 정보의 단타성 파열’은 무거운 결과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이 위험은 ‘명백하고 바로 보이지’ 않지만, 모호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증식된다. 트윗을 올리는 일은 마치 식이요법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불량 식품을 먹으며 해방감을 느끼듯이 사실로 만든 집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의 명백한 가벼움에 사실과 허구, 정보와 허위 정보를 섞고 혼동한다는 데 이러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아무리 사실을 검증하더라도 대응할 수 없는 ‘가짜 뉴스’와 ‘탈진실(post-truth)’을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미디어 역사의 한 모순적인 시기를 살고 있다. 엉뚱한 트윗에 대한 첫인상이나 순간적인 소셜미디어 포스팅은 더욱 사악한 그림, 즉 클레의 〈지저귀는 기계〉의 어두운 색채와 같이 자욱하게 누적된다.

벤 데커(Ben Decker), “Membership of Anti-Mask Facebook Groups Jumps Sharply” [마스크 착용 반대 페이스북 그룹 가입자 급증하다] (The New York Times, 01.10.2020). © Jeff Dean/Agence France-Presse — Getty Images.

코로나19가 불러온 위기 상황은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선견지명적인 저서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1964)조차 예견할 수 없었던 소셜미디어의 새로운 시급성을 이해하는 과제를 던져 줬다. 소셜미디어로부터 발생한 인식론적 혼란이 사회적, 정치적 혼란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보와 허위 정보는 숙주와 기생충처럼 깊이 연루됐다. 무엇이 숙주이고 무엇이 기생충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가 “편집증이란 다름 아니라 온갖 사실을 다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최악의 상황에서는 박식하다는 사람조차 허위 정보를 갖고 있다. 정보와 허위 정보가 중첩된 최근 상황의 예시 중 하나는 미국에서 의학적 조언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을 정치적 권리를 주장한 이들이다. 치명적인 결과만 아니었다면 웃기는 연속극 같은 것으로 남았을지 모르겠지만, 미국인들은 마스크 의무 착용을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것, 즉 사회주의적이라고 보았다. 이로써 마스크 거부는 미국의 사망자 수를 급격하게 증가시킴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위한 애국적인 행위가 됐다. 자유에 대한 광신적인 헌신은 보건에 대한 상식을 뛰어넘었다. 

미국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코로나19 혼란을 초래했고, 불량 식품과 트위터 하기를 좋아했으며, 마스크 쓰기 원칙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트럼프의 트위터 계정이 2021년 1월에 정지되기 전까지 그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여러 플랫폼을 통해 이 바이러스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팬데믹 대응을 늦췄다. 치명적으로 지연된 대응은 미디어를 통해 산발적으로 공유됐고, 그 자체로 일종의 바이러스였다. 정보 바이러스는 생물학적 바이러스와 나란히 작동하며 이를 더 증식시켰다. 허위 정보는 트럼프 지지자에게로 전파됐고, 이들도 마찬가지로 전염병의 심각성, 심지어는 그 존재를 부인했다. 인구의 60%씩이나 확진 판정을 받은 사우스다코타 주에서 공화당 소속 주지사이자 트럼프 지지자인 크리스티 노엠(Kristi Noem)은 “우리 주민들은 자유롭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이때 병원의 수용력을 초과한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가장 끔찍한 사실은 최전선에서 일하던 간호사 주디 도링(Judi Doering)이 유튜브와 트위터를 통해 전했듯 환자들이 죽어가면서도 사실을 부정하고, “이럴 수는 없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라며 마지막 숨을 내쉰다는 것이다.

“실재”를 없애버린 걸까? 생물학적 삶이 위태로울 때조차, 그것이 모두에게 명백할 때조차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그저 부정하기만 한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관념을 아예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2020년 10월,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팬데믹에 관해 논란을 일으킨 글 「아시아가 유럽보다 팬데믹에 더 잘 대처하는 이유: 예의가 정답이다(Why Asia is better at beating the pandemic than Europe: the key lies in civility)」을 발표했다. 한병철은 미국과 유럽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다루기보다 어째서 아시아가 팬데믹에 잘 대처할 수 있었는지를 언급하며 글을 시작한다. 본질주의적이라는 다분히 정당한 비판을 받았던 그의 답은 아시아 국가가 유교 문화로 인해 권위주의를 더 잘 받아들이며, 이로써 코로나바이러스의 효과를 제한하는 디지털 감시부터 마스크 쓰기에 이르기까지 정치인들과 국민의 저항이 적었다는 것이다. 아시아를 본질적인 속성으로 환원하는 것은 서구를 본질화하는 접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데, 서구 사회는 일종의 개인주의로 인해 마스크 쓰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권력에 대한 복종의 암묵적인 형태를 만날 때, 매력적이고 강력한 리더를 죽음으로까지 따르는 극단적인 것이 된다.  

나아가 한병철은 이보다는 좀더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디지털화와 가짜 뉴스가 현실을 삭제해 버렸고, 팬데믹은 컴퓨터 바이러스가 아닌 진짜 바이러스, 즉 “자연적인 것”의 충격적인 귀환이었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가상 현실에 절어버린 문화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팬데믹을 “실재의 귀환”으로 보는 관점은 실제와 가상 세계 중 하나는 진짜이고 다른 하나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이분법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다소 결함이 있다. 내가 보기에 미디어 역사상 현 시점에서 바이러스와 소셜미디어 모두 진짜라고 상정해야 비로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가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재의 귀환”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한물간 것은 다름 아닌 실제와 가상의 경계로, 이 경계가 둘의 영역을 미리 정립하고 환원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언제보다도 애매모호하고 곤란한 일에 얽혀 있는, 별 특징 없고 알아볼 수도 없는 우리의 실재를 마주한다. 클레가 예술은 시각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게 한다고 했을 때, 예술은 우리의 관념에 얽매일 의무가 없는 실재를 다룬다고 이해해 볼 수 있다.

예술이 현실과 맺는 이러한 관계를 보여주는 예시인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2019)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클레의 〈지저귀는 기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듯, 이 영화는 가벼운 사회적 코미디로 시작하지만 갈수록 위협적인 함축을 드러낸다. 플롯은 서민층인 김씨 가족이 부유한 박씨 가족의 집에 침투하기 위해 영어 과외 선생, 치료사, 기사, 가사도우미로 가장하면서 펼쳐진다. 이들은 디지털 기술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해서 가짜 대학 졸업증과 자격증을 만들어 있지도 않은 전문성을 꾸며 낸다. 제목 ‘기생충’ 때문에 빈곤층과 부유층이 서로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기생하는 것을 다루는 계급 갈등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일종의 반전이 있는데, 계급 간의 갈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빈곤한 주인공들이 생존을 위해 경쟁하면서 계급 내적으로 더 큰 갈등을 겪는 것을 보여 준다. 계급적 연대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빈곤층이 환상을 갖고, 열망하고, 모방하는 부유층을 향한 연대만 존재한다. 가장 기이한 예시로, 박씨네의 본래 가사도우미의 남편인 ‘근세’는 집주인인 박씨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이처럼 역경에 대한 (일부라도) 책임이 있는 이에 대한 왜곡된 존경은 사우스다코타 병원에 있는 코로나 환자가 지도자에게 갖는 치명적인 존경을 상기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이제 세상이 계급 갈등과 같은 과거의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돼 버렸다는 점을 시사한다. 세상은 일종의 초월적 장소(para-site)가 됐고, 문제적이고 다차원적인 실재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영화의 초반과 후반에 등장하는 “유령”은 초월적 장소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유령은 다름 아닌 전 가사도우미의 살아있는 남편으로, 존경심으로 가득 차 이제껏 지하실에 숨어 있던 남편 근세였던 것이다. 실수로 모습을 드러낸 근세를 처음 보고 충격을 받은 박씨의 막내아들은 경련을 일으키고, 그의 엄마는 미술치료사(김씨 집안의 딸)를 수소문한다. 근세의 두 번째 등장은 대혼란을 일으키고 몇몇의 목숨을 앗아가고 만다. 김씨 가족과 맞붙은 근세가 죽고, 김씨 아저씨는 박씨 아저씨를 죽인 후, 처벌을 피하기 위해 근세가 숨어있던 지하실에 숨는다. 영화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도달한다. 김씨의 아들은 아버지를 지하 저장고에서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박씨의 집을 사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부유층과의 경쟁은 결국 도피주의적인 판타지로, 초월적 장소에 출몰하는 유령을 무시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 클레처럼 봉준호 감독은 지저귀는 기계 속 유령이 실재의 찌푸린 얼굴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1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Letters to Milena (New York: Schocken Books, 1992).

BIO

아크바 압바스는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캠퍼스에서 비교문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에 앞서, 홍콩대학교 세계화 및 문화 연구센터의 비교문학전공 학장이자 공동 디렉터를 역임했다. 비평 이론 관련 에세이를 비롯해, 리우 단(Liu Dan)과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등 미술가,  왕가위(Wong Kar-wai)와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등 영화 제자에 관한 글을 저술해 왔다.